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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멸의 명시모음

시인답게 2010. 9. 19. 23:00

 

*-* 불멸의 명시모음 *-*

미소

- 후 스 (胡適) -

몇 년전

내게 던져준 그녀의 미소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녀의 미소가 좋게만 느껴졌다.


그사람 지금은 어이 됐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그 미소만은 남아있어

나는 그녀를 잊을수도 없고

갈수록 그녀가 사랑스레 느껴진다.


나는 그녀를 빌어 수 많은 시를 쓰고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갖가지 경지를 생각해 냈다.

어떤 이는 읽고서 마음아파하고

어떤 이는 읽고서 즐거워 한다.


즐거워도 마음아파도

그것은 단 하나의 미소일뿐

내 여태 미소짓던 그녀를 만나지 못했었도

나는 그녀의 미소가 정말 좋아 고마워 한다.




서 시

- 윤 동 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초 혼 (招 魂)

- 김 소 월 (金 素 月)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신 록 (新綠)

- 서 정 주 (徐 廷 柱) -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 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세월이 가면

- 박 인 환 (朴 寅 煥) -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공존의 이유

- 조 병 화 -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 조 병 화 -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잎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 천 명 (盧 天 命)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푸른 오월

- 노 천 명 (盧 天 命) -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이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낙 화

- 이 형 기 (李 炯 基) -

가아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귀 천 (歸 天)

- 천 상 병 (千 祥 炳) -

---주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쓰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만 하리라.....




청 포 도

- 이 육 사 (李 陸 史) -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추 삼 제 (秋 三 題)

- 이 희 승 (李 熙 昇) -

벽 공 (碧 空)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낙 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靜寂)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 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남 창(南 窓)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瞳孔)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


이렇게 명창청복(明窓淸福)을

분에 겹게 누림은.




춘 신 (春 信)

- 유 치 환 (柳 致 環) -

꽃등인양 창 앞에 한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바 위

- 유 치 환 (柳 致 環) -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국화 옆에서

- 서 정 주 (徐 廷 柱)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푸르른 날

- 서 정 주 ( 徐 廷 柱)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 영 랑 (金 永 郞)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저 녁 에

- 김 광 섭 (金 珖 燮)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기다림

- 모 윤 숙 (毛 允 淑) -

천년을 한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다.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方言)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五月江)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초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나이까?

내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나그네

- 박 목 월 (朴 木 月) -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접시꽃 당신

- 도 종 환 -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 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수 있는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땜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사 슴

- 노 천 명 (盧 天 命)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 이었나 보다.


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김 춘 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싶다.




기 다 림

- 조 지 훈 -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 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서를 리야 ...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 신 달 자 (申 達 子)-

네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


팔을 들어

네 속닢께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서

오래 오래 서 있으면


거리도 없이

너는 내 마음에 와 닿아

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하나

무량하게 피어올라


나는 네 앞에서

발이 붙었다.




서 리 꽃

- 유 안 진 (柳 岸 津) -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져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詩)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사랑하는 까닭

- 한 용 운 (韓 容 雲)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 한다지만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님의 침묵

- 한 용 운 (韓 容 雲)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 떠날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진달래 꽃

- 김 소 월 (金 素 月)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귀전 원거 (歸田園居)

- 도 연 명 (陶 淵 明) -

    젊어서 세속에 적응하지 못했으니, 성격이 본래 인덕과 산을 사랑했다. 잘못 올가미에 빠져 내처 삼십년이 지났다.

    조롱 의 새도 옛날의 숲을 그리워 한다. 연못의 고기도 이전의 늪을 생각한다. 남쪽 들 의 황무지를 개간 하자, 고집 을 세우고 전원 으로 돌아온다.

    마당은 천여평 인데, 초가 는 팔, 구 간이다. 버들, 느릅나무 는 뒤 처마를 그늘 지우고, 오얏, 복사나무는 마루앞에 늘어서있다.

    가물가물 촌락은 먼데, 하늘하늘 마을의 연기. 개는 골목길 안에서 짖고, 닭은 뽕나무 위에서 운다.

    집안에 번거로움이 없으니, 빈 방에 한가로움이 넘친다. 오랫동안 새장 속에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 왔구나!

    들판 밖에는 인사 치레가 적으며, 골목 안에는 거마 왕래가 드물다. 대낮에도 가시나무 사립을 걸어두니, 빈 방에는 번잡스런 생각이 끊어진다. 때로는 후미진 길을 따라 풀을 헤치며 서로 내왕도 하건만, 만나야 허튼소리는 없고 다만 뽕나무, 삼이 자라는 얘기.

    뽕나무, 삼은 날마다 자라고 내 땅은 날마다 넓어 지지만, 늘 두렵기는 서리와 싸락눈이 와서 잡초와 함께 시들까 하는것이다.

    콩 을 남산밑에 심었더니, 풀만 무성하고 콩 모종은 드물다. 새벽에 일어나 기음을 매고, 달빛속에 호미메고 돌아온다.

    길은 좁은데 초목만 크게자라, 저녁 이슬에 내옷이 젖는다. 옷이 젖는 거야 아깝지 않지, 다만 소망만 어그러지지 말아라.

    오래 산과 진펄을 떠나긴 했지만, 광막한 숲과 들은 즐거운 곳이다. 아이놈들 데리고 떨기나무 헤치며, 황폐한 촌락을 거닐어 본다.

    무덤 사이에서 오락가락, 예전 집터에서 서성서성. 우물 과 부뚜막이 있었던자리, 뽕나무와 삼이 썩은 그루터기.

    나뭇꾼을 찾아 물어본다. 「이 사람들 모두 어디로 갔나요?」 나뭇꾼이 나 에게 대답한다. 「죽어버리고 남은 사람이 없습죠!」

    한 세대면 세상이 바뀐다고, 이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인생이란 환상과 같은것. 끝내 공허로 돌아가고 만다.

    언짢은 마음, 홀로 막대를 짚고, 꾸불텅 꾸불텅 떨기나무 사이로 온다 산골 물은 맑고도 얕아, 나의 발을 씻을 수 있도다. 새로 익은 술을 걸러 다오, 닭 마리로 이웃을 부르겠다.

    해가 지니 방안이 어둡지만, 가시나무로 촛불을 대신한다. 즐거울땐 짧은 밤이 안타깝다. 벌써 아침 해가 떠 오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 상 용 -

    남 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 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 시 화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 생 진 -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은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도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을놈의 고독은 취하지도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는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그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는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이를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더 태어나는 이를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게는 하품이 잦아 있었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은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은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은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 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이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하다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사 모

    - 조 지 훈 -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하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 석 헌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고 향

    - 노 천 명 -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 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훗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깨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꺽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블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벗 하나 있었으면

    - 도 종 환 -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 도 종 환 -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움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아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방 랑 기

    - 이 설 주 -

    숭가리 황토 물에 얼음이 풀리우면
    반도 남쪽 고깃배 실은 낙동강이 정이 들고

     
    산마을에 황혼이 밀려드는 저녁밤이면
    호롱불 가물거리는 뚫어진 봉창이 서러웠다.

     
    소소리바람 불어 눈 날리는 거리를
    길 잃은 손이 되어

     
    몇 마디 줏어 모은 서투른 말에
    꾸냥이 웃고 가고

     
    행상에 드나드는 바쁜 나루에 물새가 울면
    외짝 마음은 노상 고향 하늘에 구름을 좇곤 했다.

     
     


     

    고 향

    - 정 지 용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더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낙 화

    - 조지훈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행 복

    - 유 치 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저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해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연 가

    - 강계순 -

    우리가 만일 바람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깊은 안개
    눈 가리고
    낯 가리고
    심장에 칼 꽂는 피도 가리고
    허공에 잠시 웃다가 돌아가는
    바람이 되어 만난다면

     
    수수깡 널려 있는 뜰안 한 귀퉁이
    혹은 대청마루
    반들거리는 나무결 위에
    습기 없는 햇살로
    다시 만난다면

     
    모두가 떠나가고
    첫눈 내리는 아침
    비상하기 위하여
    날개를 펴는
    새의 순수로 만난다면

     
    질기고 긴 세월
    구석구석 저리는 관절염의
    오,
    우리가 매일 무엇으로 다시 만난다면

     
     


     

    너를 위하여

    - 김 남 조 -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 종 환 -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 보다는
    구름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 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빚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는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마 음

    - 김 광 섭 (金 珖 燮)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금 잔 디

    - 김 소 월 (金 素 月)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산 유 화 (山 有 花)

    - 김 소 월 (金 素 月)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느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오다 가다

    - 김 억 (金 億) -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 산은 청청
    풀 입사귀 푸르고
    앞 바단 중중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돗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가을의 기도

    - 김 현 승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태연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김 영 랑 (金 永 郞)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박 두 진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듬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귀 촉 도 (歸 蜀 途)

    - 서 정 주 -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그 날이 오면

    - 심 훈 -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띄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윤 동 주 -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멧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임께서 부르시면

    - 신 석 정 (辛 夕 汀) -

    가을날 노라케 물들인 은행닢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드시
    그러케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湖水)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러케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구비구비 하눌 까에 흐르는 물처럼
    그러케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러케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천사의 눈물

    - 오 승 훈 -

    이제는 당신과의 인연의 끈을 늦추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이끌어 온 건
    당신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을 사랑한 것이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당신을 자유롭게 해 줌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당신을 더욱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나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운명이란 것을 거부하며 살아 왔습니다
    운명이란 건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 운명이라는 것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결말지어질 것이라는 운명을
    이제야 왜 그렇게 운명지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건 내 탓입니다
    내 이기심이 당신에게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웃는 얼굴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합니다

     
     


     

    아 가 야

    - 천 상 병 (千 祥 炳) -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 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 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
    자주 뒤돌아 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메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 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마 !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 도 종 환 -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이 밀리여 넘쳐
    다가갈수 없는 큰 물너머로
    영영 갈라져 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 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 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결혼이라는 것

    - U. 샤 퍼 -

    혼자라는 것이 싫어
    당신과
    결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
    외로움을 없애줄 것이라고 상상할 만큼
    어린애도 아닙니다.
    숱한 애인들이, 부부들이
    입버릇처럼 사랑한다고 되뇌지만
    그 얼굴에선
    언뜻언뜻
    짙은 고독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혼자라는 것,
    애인이 없다는 것을
    우리 겁내지 맙시다.
    결혼해야 한다는 주위의 압력도
    크게 걱정하지 맙시다.
    우린
    무엇보다 결혼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뚜렷한 이유를,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을 에는

    - 최 영 미 -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 편지

    - 이 해 인 -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읍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읍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읍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읍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읍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읍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 밖엔
    가진 게 없읍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읍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읍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읍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읍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읍니다

     
     


     

    가을 사랑

    - 도 종 환 -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평 행 선

    - 김 남 조 -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읍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 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본 적도 없읍니다.

     
     


     

    에너벨 리

    - 에드가 알렌 포우 -

    오랜 오랜 옛날
    바닷가 그 어느 왕국엔가
    에너벨 리라 불리는
    혹시 여러분도 아실지 모를
    한 처녀가 살았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이왼
    아무 딴 생각 없는 소녀였답니다

     
    나는 어린애, 그녀도 어린애
    바닷가 이 왕국에 살았지.
    그러나 나와 에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었지.
    하늘 나라 날개 돋친 천사까지도
    탐내던 사랑을

     
    분명 그 때문이랍니다.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한 조각 구름에서 바람이 일어
    나의 아름다운 에너벨 리를 싸늘히 얼게한 것은
    그리하여 그녀의 고귀한 집안 사람들이 와서
    나로부텨 그녀를 데려가서
    바닷가 이 왕국의
    한 무덤 속에 가둬 버렸지요.

     
    우리들의 행복의 반도 못 가진
    하늘 나라의 천사들이 끝내 샘을 냈답니다.
    그렇지요, 분명 그 때문이죠.
    (바닷가 이 왕국에선 누구나 다 알다시피)
    밤 사이 구름에서 바람 일어나
    내 에너벨 리를 얼려 죽인 것은 그 때문이죠.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드의 사랑보다도
    우리 사랑은 훨씬 더 강했읍니다.
    위로는 하늘의 천사
    아래론 바다밑 악마들까지도
    어여쁜 에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갈라 놓진 못했답니다.

     
    달빛이 비칠때면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꿈이 내게 찾아 들고
    별들이 떠오르면
    에너벨 리의 빛나는 누동자를 나는 느낀답니다
    그러기에 이 한 밤을 누워 보니다.
    나의 사랑, 나의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
    파도 소리 우렁찬 바닷가 내 임의 무덤 속에.

     
     


     

    가 끔 은

    - 서 정 윤 -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멋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내가 만약 어떤이의 마음속에

    - 칼릴 지브란 -

    내가 만약 어떤이의 마음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면,
    그에게 있어 나의 삶은 결코 헛된것이 아닙니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의 실제일 뿐
    환희나 고통,
    행복이나 불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증오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은 친구와 같습니다.

     
    홀로 사는 삶을 사십시요.
    바로 자신의 삶을.
    그리하면 우리는 진정한 인류의 친구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나날이 거듭납니다.
    내 나이 여든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변화의 모험을 계속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행한일은
    더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일 따름입니다.

     
    나에게는
    껴안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삶의 한가운데에

     
     


     

    가는 길

    - 김 소 월 (金 素 月) -

    그립다
    말을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西山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江물, 뒷 江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어서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낙 엽

    - Gourmon -

    시몬...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알 수 없어요

    - 한 용 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올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자취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낙 화

    - 한 용 운 -

    떨어진 꽃이 힘없이 대지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향기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작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 못하는 집의 울타리 사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부끄러움 많고 새암 많고 미소 많은 처녀의 입술로 들어가는 것을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작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없은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 가는 아가의 발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 사 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소...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습니다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을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갈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버렸오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 한 살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님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山)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넌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니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어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하고 앉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왕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공존의 이유 12

    - 조 병 화 -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휘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부치지 않은 편지

    - 정 호 승 -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편 지

    - 김 남 조 -

    그대만큼 사랑스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서 시

    - 김 남 조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히 그 순간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없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해바라기의 연가

    - 이 해 인 -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어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이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읍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어
    드릴 것은 상처 뿐이어도
    어둠에 숨기지 않고

     
     


     

    우울한 샹송

    - 이 수 익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별을 쳐다보며

    - 노 천 명 -

    나무는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댔자
    또 미운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눈물 연가

    - 나 혁 채 -

    한 여인 앞에
    산처럼 남고 싶다.

     
    그 여인이 마음놓고
    와 안겨 울 수도 있고,
    마음놓고 바라보며 위안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고 싶다.

     
    그 여인이 마음 놓고 떠날 수도 있게,
    이젠 아주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빙긋이 웃어보이며,
    찢긴 가슴 바위 속을 눈물로
    가득히 채울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아 있고 싶다.

     
    물론, 나도, 그 여인이 마음놓고
    와 안겨 웃을 수 도 있고, 마음놓고
    바라보며 그리워할 수도 있는
    그런 산처럼 남아 있고도 싶지만,
    그것은 영 분에 넘치는 일이라
    그저 한 가지, 노자삼아 떠날 수 있게,
    나 숨지면, 눈물이나 몇 방울
    보내주지 않을까 하다가,
    아니 아예 그런 욕심까지 끊어버리고
    제 타는 눈물로나 배를 띄워 떠나갈
    그런 산처럼 나는 남아 있고 싶다.
    다만, 그 여인이 마음놓고
    와 안겨 울 수도 있고, 마음놓고
    바라보며 위안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산처럼 남고 싶다.

     
    오직 한 여인 앞에
    산처럼 남고 싶다.

     
     


     

    의 미

    - 서 정 윤 -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 보다
    더 큰 삶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창가에서

    - 서 정 윤 -

    어느 날
    불현듯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채
    다시 쓸쓸해진다.

     
    기쁨들로 인해
    혼자일 수 밖에 없는 날
    슬픔은 눈물로 인해
    더욱 구차해질 수 있기에
    노래를 불러도
    가슴속 상처가 아려서
    다시 되풀이되고

     
    내가 넘어야 할 언덕은
    이럴수룩 자꾸만 높아지는데
    어디쯤에서
    쉼표를 찍어야 할지
    마침표가 먼저 나오려 한다.

     
     


     

    바 람

    - 김 남 조 -

    바람 부네
    바람 가는데 세상 끝까지
    바람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靑果) 연한 과육(果肉)에
    수태(受胎) 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果園)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말지 하는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이 바람이던게야
    바람이 의관(衣冠) 쓰고
    나들이온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따라 나도 갈래
    바람가는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바람이여

    - 서 정 윤 -

    바람이고 싶어라
    그저 지나가버리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하니 지나가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목숨을 거두는 어느 날
    내 가진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니고
    육체마저 벗어두고 떠날 때
    허허로운 내 슬픈 의식의 끝에서
    두 손 다 펴보이면 지나갈 수 있는
    바람으로 살고 싶어라.

     
    너와 나의 삶이 향한 곳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슬픈 추억들 가슴에서 지우며
    누구에게도 흔적 남기지 않는
    그냥 지나는 바람이어라
    바람이어라.

     
     


     

    못 잊 어

    - 김 소 월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떠나가는 배

    - 박 용 철 -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홀로 서기

    - 서 정 윤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면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누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 뒤로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여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톰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서기` 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별 헤는 밤

    - 윤 동 주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너 에 게

    - 김 남 조 -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 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 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 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 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추 억

    - 조 병 화 -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줏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도 종 환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6월엔 내가

    - 이 해 인 -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하 늘

    - 김 남 조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날마다 슬퍼함으로
    슬픔에 배부를 것이요
    다른 굶주림은
    모두 잊으리라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도 끝을 알 것이요
    끝에선 하나가 먼저 떠나리로다
    이날에 하늘을 보리니
    수식어는 모두 죽고
    다만
    하늘이리라

     
     


     

    참말로의 사랑은

    - 나 태 주 -

    참말로의 사랑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수 있는 자유와
    나를 미워할수 있는 자유를 한꺼번에
    주는 일입니다.
    참말로이 사랑은 역시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머물수 있는 자유와
    나를 떠날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따지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바라만 보다가
    반쯤만 눈을 뜨고
    바라만 보다가.

     
     


     

    고 독

    - 노 천 명 -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습니다.

     
    번잡이 이처럼 싱크러울때
    고독은 단 하나의 친구라 할까요.

     
    그는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로
    나를 데리고 가
    내 이지러진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고독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
    함부로 권할 수 없는 것
    아무나 가까이 하기 어려운 것인가봐요.

     
     


     

    구름 같이

    - 노 천 명 -

    큰 바다의 한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작음을 깨닫고
    모래 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 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한것 같아 들국화 꺽어들고
    아름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 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이니
    내 인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인생
    구름같이 왔다 가나보오

     
     


     

    잎새 하나의 시

    - 노 향 림 -

    이 세상에서
    너와 내가 믿음 하나 있다면
    조용히 바스락 거리듯이 살다가

     
    우리의 뿌리로 내려가
    마음의 가장 깊은곳에
    무지개를 걸듯 나이테를 앉히고
    한 나무속의 한뿌리로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의 헤어짐은 잠시이고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이므로
    이세상 어딘가에 살아남아
    한잎의 목숨을 피워내는 일이다.

     
     


     

    가을비

    - 도 종 환 -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읍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도 종 환 -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 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 종 환 -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얼 굴

    - 박 인 환 -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눈 물

    - 서 정 윤 -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읍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읍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읍니다
    내 속에 있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나>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나는것이
    고마울 때가 있읍니다.

     
     


     

    들꽃에게

    - 서 정 윤 -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없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홀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 김 미 선 -

    그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지금처럼만
    사랑해 주십시오

     
    그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지금처럼 가슴으로만
    사랑해 주십시오

     
    그대 눈에 비치는
    내 삶이
    하도 아파보여서
    그 아픔 잠시
    덜어주려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애틋한 시선으로
    사랑어린 연민으로
    내 어깨를 감싸주는
    그 손길은
    언제인가
    거두어지니까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뒤돌아 서면서
    차츰씩 엷어지는
    그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신 부

    - 서 정 주 -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
    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
    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연꽃 만나고

    - 서 정 주 -

    連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백치 애인

    - 신 달 자 -

    나에겐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를, 그리워하는지를 그는 모른다.
    별볼일 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다방에서 다방문이 열릴때마다 불길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 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내게 한 마디 말도 해 오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나를 떠난 그 어디서나 총명하고 과감하면서, 내게 와서 너는
    백치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백치인 너를 사랑하며 바보인 너를 좋아한다. 우리가 불로 만나
    타오를 수 없고 물로 만나 합쳐 흐를 수 없을 때, 너는 차라리 백치임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 것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그 허허로은 결과를 알고 먼저 네 마음을 돌처럼 굳혔는가.
    그 돌같은 침묵 속으로 네 감정을 가두어두면서 스스로 너는 백치가 되어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가.
    바보 애인아. 세상은 날로 적막하여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큰 과업처럼
    야단스럽고 또한 그처럼도 못하는 자는 절로 바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래, 바보가 되자.
    바보인 너를 내가 사랑하고 백치인 네 영혼에 나를 묻으리라.
    바보 애인아. 거듭 부르는 나의 백치 애인아. 잠에 빠지고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부르며 잠에서 깬 그 첫 여명의 밝음을 비벼집고 너의 환상을 쫓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너는 너무 모른다. 정말이지 너는 바보, 백치인가.
    그대 백치이다. 우리는 바보가 되자. 이세상에 아주 제일가는 바보가 되어서
    모르는 척하며 살자. 기억속의 사람은 되지말며 잊혀진 사람도 되지말며 이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자. 우리가 언제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언제 마주앉아 차를
    마셨던가.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딪고 지나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관계에선 우리에게
    결코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애인이다. 백치 애인이다.

     
     


     

    백치 슬픔

    - 신 달 자 -

    사랑하면서
    슬픔을 배웠다.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보다 더 크게
    내 안에 자리잡은
    슬픔을 배웠다.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식량
    사랑은
    늘 타는 목마름

     
    슬픔은 구름처럼 몰려와
    드디어 온몸을 적시는
    아픈 비로 적시나니

     
    사랑은 남고
    슬픔은 떠나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슬픔아
    이 백치 슬픔아

     
    잠들지도 않고
    꿈의 끝까지 따라와
    외로운 잠을 울먹이게 하는
    이 한덩이
    백치슬픔아

     
    나는 너와 이별하고 싶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 안 진 -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조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가지 계속 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침대갖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푸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사람을 사랑 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구 름

    - 유 치 환 -

    다시 한 번 우러러 구름을 보소

     
    인정의 고움을 가리워 구름은
    노래인 양 저렇게 세상을 수놓았나니

     
    그리우면 그리운대로
    책장처럼 넘어가는 푸른 조석인데도

     
    그대 곰곰이 마음 지쳤을 때는
    나의 꿈꾸고 두고 간 저 구름을

     
    다시 한번 조용히 우러러보소

     
     


     

    사 랑

    - 이 은 상 -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될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타고 꺼질진댄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 초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호 수

    - 정 지 용 -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향 수

    - 정 지 용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돌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빈 집

    - 기 형 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 병 화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고독하다는 것은

    - 조 병 화 -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임에게

    - 박 목 월 -

    안타까운
    마음은

     
    은은히 흔들리는
    강나룻배

     
    누구를 사모하는
    까닭도 없이

     
    문뜩 흔들리는
    강나룻배

     
     


     

    산이 날 에워싸고

    - 박 목 월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개여울

    - 김 소 월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

     
    파룻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그대에게

    - 김 소 월 -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세운 날도 없지않지만
    지금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없는 베겟가의 꿈은 있지만

     
    낯 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 들에 헤메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세월이 물과같이 흐른 삼 년은
    길어둔 독엣 물도 찌었지만은
    가면서 함께가자 하던 말씀은
    살아서 살을 맞는 표적이외다

     
    봄풀은 봄이 되면 돋아나지만
    나무는 밑그루를 꺽은 셈이요
    새라면 두 죽지가 상한 셈이라
    내몸에 꽃 필 날은 다시 없구나

     
    밤마다 닭소리라 날이 첫시면
    당신으 넋 맞으러 나가 볼때요
    그믐에 지는 달이 산에 걸리면
    당신의 길신가리 차릴 때외다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 가지만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당신을 아주 잊던 말씀이지만
    죽기전 또 못 잊을 밀씀이외다

     
     


     

    - 김 소 월 -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집에
    까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마소 내 집도
    정주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 소 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처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 김 소 월 -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 다 당신 때문에 있읍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같이 당신한테로 가오리다.

     
    오오, 나의 애인이었던 당신이여.

     
     


     

    고 락

    - 김 소 월 -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기구한 발뿌리만 보지 말고서
    때로는 고개 들어 사방산천의
    시원한 세상풍경 바라보시오.

     
    먹이의 달고 씀은 입에 달리고
    영욕의 고와 낙도 맘에 달렸소
    보시오 해가 져도 달이 뜬다오
    그믐밤 날 궂거든 쉬어 가시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숨차다 고갯길을 탄치 말고서
    때로는 맘을 눅여 탄탄대로의
    이제도 있을 것을 생각하시오.

     
    편안이 괴로움의 씨도 되고요
    쓰림은 즐거움의 씨가 됩니다
    보시오 화전망정 갈고 심으면
    가을에 황금이삭 수북 달리오.

     
    칼날 위에 춤추는 인생이라고
    물속에 몸을 던진 몹쓸 계집애
    어쩌면 그럴 듯도 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줄은 왜 몰랐던고.

     
    칼날 위에 춤추는 인생이라고
    자기가 칼날 위에 춤을 춘 게지
    그 누가 미친 춤을 추라 했나요
    얼마나 비고인 계집애던가.

     
    야말로 제 고생을 제가 사서는
    잡을 데 다시 없어 엄나무지요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길가의 청풀밭에 쉬어 가시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기구한 발뿌리만 보지 말고서
    때로는 춘하추동 사방산천의
    뒤바뀌는 세상도 바라보시오.

     
    무겁다 이 짐을랑 벗을 겐가요
    괴롭다 이 길을랑 아니 걷겠나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보시오 시내 위의 물 한 방울을.

     
    한 방울 물이라도 모여 흐르면
    흘러가서 바다의 물결 됩니다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 됩니다
    다시금 땅에 내려 비가 됩니다.

     
    비 되어 나린 물이 모둥켜지면
    산간엔 폭포 되어 수력전기요
    들에선 관개 되어 만종석이오
    메말라 타는 땅엔 기름입니다.

     
    어여쁜 꽃 한 가지 이울어 갈 제
    밤에 찬이슬 되어 추겨도 주고
    외로운 어느 길손 창자 주릴 제
    길가의 찬 샘 되어 누꿔도 주오.

     
    시내의 여지없는 물 한 방울도
    흐르는 그만 뜻이 이러하거든
    어느 인생 하나이 저만 저라고
    기구하다 이 길을 타발켰나요.

     
    이 짐이 무거움에 뜻이 있고요
    이 짐이 괴로움에 뜻이 있다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이
    이 세상 사람다운 사람이라오.

     
     


     

    옛 이야기

    - 김 소 월 -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읍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었읍니다

     
    그런데 우리 임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어 두었던
    옛이야기뿐만은 남았읍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줍니다

     
     


     

    6월의 시

    - 김 남 조 -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하루만의 위안

    - 서 정 주 -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벼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출처 : 오늘은 참 좋은 날
글쓴이 : 석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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