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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함민복

시인답게 2010. 9. 19. 19:25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꾹 다문 입처럼 그어놓은 한 줄짜리 시. 오늘은 한 줄짜리 시를 읽어볼까 해요. 딱 한 줄뿐이에요. 독자 여러분이 이 한 줄짜리 시로 어떻게 넓은 지면을 채웠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시는 여백을 많이 두고 편집해야 한답니다. 100호짜리 그림에 점 두어 개만 찍어 넣는 이우환 선생 그림처럼. 나머지는 읽는 사람이 채워 넣어야 할 몫.

말을 줄이면 줄일수록 뜻이 넓어지는 것이 시의 말법이라는 걸 다들 아시잖아요.

이 시를 쓴 이는 마흔 중반이 넘도록 강화도 남쪽 외딴 마을에서 월세 10만 원짜리 폐가를 얻어 혼자 살고 있다고 해요. 시궁창 같은 이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해 스스로 극빈(極貧)의 삶을 선택한 거지요. 그이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 씨앗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실금실금 가는 곳마다 뿌린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이가 사는 동네 주변은 온통 코스모스 천국이 되었다는 말이 전하고 있어요.

코스모스로도 위안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밤이었던가 보네요. 환한 달빛이 영창 너머로 마구 쏟아드는 밤이었겠지요. 새벽까지 당신 생각을 ‘켜놓고’ 잠든 꿈 속으로는 또록또록 귀뚜라미 소리가 기어들고, 선득한 바람이 부풀려 놓은 커튼이 얼굴을 간질이기도 했겠지요. 지이직 지이직, 엎드려 잠든 어깨 너머로 애국가도 끝난 텔레비전이 목쉰 목소리로 껌뻑이며 부르고 있었겠지요.

그런 날이 분명 있었지요? ‘당신’께서도.

장옥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