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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 정호승 시모음

시인답게 2010. 4. 27. 17:50

     

     

     

     

     

     

     

    첫눈 오는 날 만나자...정 호 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깅릉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랑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첫키스에 대하여

           

          내가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다 기어이 보고 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수평선으로 난 오솔길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난 해당화

          그 붉은 꽃잎들의 눈물이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 길을 걸어갈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이 세상 별빛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사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 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서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라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회망이었다



          강변 옆에서

          별에 쌓여있는 희미한 전설같이
          내가 언젠가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걸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먼 훗날
          우리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는 전설같이
          남아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끔찍이 사랑했었다는
          그 진실이 희미한 별빛에 아롱아롱 박히어
          영원히 이 세상에 고이고이 존재하는
          전설로 남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오기 전부터 알고있는
          희미한 별의 전설처럼
          예전의 나의 맹세도 그렇게 밝게 빛나는
          저기...
          저 어디인가에 있는
          어느 별엔가 갇혀있을 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고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을
          저 별빛에 대고 맹세합니다..



          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파도타기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
          또 이 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
          굳어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
          넘쳐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
          서러울수록 봄눈을 기다리며 간다.
          다정큼나무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
          지난 가을 산국화도 몸을 던지고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
          단 한 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괴로울수록 홀로 넘칠 파도를 탄다.
          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오는 바다 위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生).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 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안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질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옆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잇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등신불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별들은 따뜻하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똥별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내가 너를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너의 눈물을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내가 너의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줄
            넌 모르지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봄날

            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었습니다
            그 아무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는 개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코 새 한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우리들 인생도 어느새 날이 저물고
            까치집도 비에 젖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무덤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새똥이 아름다운 봄날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이별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첨성대(瞻星臺)

            -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一平生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 단 한 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불던 그믐밤

            첨성대 꺽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繡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댕기 흔들며

            벌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冬至날 흐린 눈물 北極星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 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무덤 몰래 하나 파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논 할머니 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은 산여우 울음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 길을

            빚장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빙 빙 첨성대를 따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 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石燈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日官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小盤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端午날 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繡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엇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부치지 않은 편지 1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새벽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쓸쓸한 편지

            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 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때까지
            잠시 나그네 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소리 그친 뒤에도 ..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잎새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내가 울던 날
            싸리 나무 사이로 어리던 너의 얼굴
            이제는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도 깊어지면
            때때 머물곳도 필요하다



            윤동주의 서시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그루의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이별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잎새에게

            하느님도 쓸쓸하시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사랑을 바라다가 쓸쓸하시다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소리없이 지나가는 들녘에 서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지 알 수 없어라

            그대는 광한루 돌담길을 홀로 걷다가
            많은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나니
            미소로서 그대를 관통하던 밝은 햇살과
            온몸을 간지럽히던 싸락눈의 정다움을 기억하시라

            뿌리째 뒤흔들던 간밤의 폭풍우와
            칼을 들고 설치던 병정개미들의 오만함을 용서하시라
            우듬지 위로 날마다 감옥을 만들고
            감옥이 너무 너르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나니
            그대 가슴 위로 똥을 누고 가는 저 새들이
            그 얼마나 아름다우냐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 없어
            하느님도 쓸쓸한 저녁 무렵
            삶은 때때로 키스처럼 반짝거린다








            저녁별

            빈 손을 들고 무덤으로 간다

            국화 몇 송이 문득 강가에 내던지고
            오직 빈 손으로 저녁날 무덤가에 가서
            마른 풀들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분노가 있어야 사랑은 있고
            희망이 있어야 노래는 있는가

            검정딱새 한 마리 내 뒤를 따라와
            눈물의 붉은 비 거두어가고

            어느덧 무덤가에 스치는 저녁별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벋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정호승 시 ...

             


                 

                 

                 

                 

           

          "시를 발견하는 기쁨" / 정호승 프란치스코

           

          정호승 鄭浩承 (1950.1. 3 -   )

           

          1950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였다. 이후 시집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987) 등을 통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을 따뜻한 시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암울한 분단상황에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슬프고도 따뜻한 시어들로 그려내었다. 《샘터》 편집부와 《월간조선》에서 근무하였고, 2000년 현대문학북스 대표가 되었다.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2000),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0) 등이 있고, 수필집 《첫눈 오는 날 만나자》(1996)와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1996), 《연인》(1998), 《항아리》(1999), 《모닥불》(2000),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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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 이야기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평론가 하응백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 세계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서부터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인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산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도 사랑을 위한 기다림의 끈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

          ('서울 복음 2'). 세 번째 시집 <새벽 편지>에서 시인의 사랑은 사회 전체로 확대 ·

          변주 ·일반화된다. 그는 전태일의 고귀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허연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홀로 울고 있는 꽃다발 하나"('꽃다발')을 영전에 바친다.

          네 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시인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서

          촉발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어떤 사랑').

           

          이후 7년만에 상자한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체득이 외로움과 숙명적으로 결합하여

          우주적인 교감의 세계로 확산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외로움이 내재된

          슬픔 사랑을 그의 시적 영토로 이주시켜 다음 같은 절창을 낳는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수선화에게').

           

          최근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간행했다.

          사랑의 본질은 비움과 채움, 감춤과 드러냄의 끝임 없는 길항(拮抗)임을 간결한 시행에 담아 낸, 그야말로 이 시집에 진주처럼 박혀 있는 빛나는 소품 하나.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반달') 어쨌든,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시인이다.

           (류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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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음악과등산활동
          글쓴이 : 너울가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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