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박해
보이는 시의 조건 2...<풋내나는 글과 발효된글의 차이> 3...<시에서 만큼은 ..모모인 척 하지 말라> 4...<시를 쓴다는 것은... > 5...<시에서만큼은 띄어쓰기를 무시하자 1...<천박해 보이는 시의 조건> 시가 천박해 보인다.... 이것에 동요할 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좋은 시를 망치는 요인을 이렇게 말해보려 한다. 1. 부호 사용. 부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호 사용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이다. 특히 말줄임표(......) 쓰는 것에 신중을 기하였으면 좋겠다. 물론 말 줄임표를 사용하면 슬픔의 애절한 느낌이나 여운을 주기 때문에 감정 전달에 매우 큰 역할을 하나, 계속해서 말 줄임표를 사용한 시는 독자가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같은 감정에 휩쓸려 제대로 시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축 쳐진 느낌의 시로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이 시는 못 쓴 시다.' 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슬러시(/)의 사용에도 신중을 기하여야 하겠다. 슬러시는 읽을때 슬러시 부분에서 흐름을 중단시켜 빨리 빨리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생각을 하게 하고, 또한 운율감을 느끼게 하여 역동적이거나 비장함 등의 감정들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때나 슬러시를 사용하면 시의 흐름이 망가지거나 운율감이 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슬러시 효과는 시가 도형적으로 보여져 시각적으로 '읽기 싫다'는 느낌이 들게도 한다. 여기서 슬러시를 잘 사용한 한 예를 들어보자. ======================================================= <거 울> -박종희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서러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픔속에 해묵은 세월은 태초의 어둠처럼 일어서는데 고대로부터 서러운 전설은 가시지않는 괴로움의 탄식으로 시작된 것을 밤중에 이를듣는 서러운 사람 -탄식케하라 -흔들려라 /쨍/그/랑/!/ /깨/진/유/리/거/울/속/에/수/많/은/내/가/있/다/ ======================================================= 정말 뛰어난 구성이 아닐 수 없다. 거울의 깨짐과도 슬러시는 잘 어울려 빛을 발하고 있고, 하나하나 글자를 읽어가며 숨막히는, 그리고 선명한 효과로 머릿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2. 한자어의 사용. 한자어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잘 사용하면 함축적인 생각들을 담아낼 수 있으며 특히나 '동음이의어'의 사용으로 기발한 시어가 재 창조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자어는 고전적인 느낌이나 차분히 가라앉은, 또는 무거운 감이 들게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자어의 남발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어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시의 주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불필요한 곳에 까지 한자어를 사용하면 시가 지저분해 보이거나 고리타분해 보인다. 그리고 너무 딱딱한 감이 들어 독자는 시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뭔가 있어 보이려는', '보여지기 위한' 시를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자어의 사용이 이상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 안쓰럽다. 3. 채팅 언어의 사용 가장 천박해 보이는 조건이라 말할 수 있다. 시에서 채팅에서나 볼 수 있는 줄임말이 사용된다던지(이것은 거의 무의식 중에 일어난다) 채팅 합성어, 표기가 변한 말 등을 사용하거나 하면 '의미심장한' 글을 쓰려해도 '가벼워' 보이거나 '발랄한' 글을 썼다 해도 '장난 친것' 같이 보인다. 물론 시에서는 자신의 마음대로 언어를 조합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그것들로 하여금 함축된 어떤 의미나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채팅언어의 다른 점은, 그것은 어떤 의미나 감정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자칫 '언어유희'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팅언어도 잘 쓰이면 멋진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주 적절하고 꼭 필요한 부분에서 채팅언어가 쓰인다면 그 시는 좋은 시가 될 것이다. 필자는 아직 그런 시를 본 일이 없어 옮길 수가 없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시를 쓸 수 있는 천재성을 겸비한 나그네가 다가올 성 싶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틀린 맞춤법도 시를 망치는 요인이 된다. 실수로 한 것이라도 무식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시들에서는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효과로 기발하고 산뜻한 시를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천박해 보이는 시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몇가지 따져 보았다. 이것들은 적절히 사용하면 작품이 되지만 남발하면 폐품이 되어버린다. 보석이기도 하면서 돌이기도 한 것들... 잘 따져보며 고심해서 사용해야 하겠다. 2...<풋내나는 글과 발효된글의 차이> 원론적인 얘기 하나. 풋내나는 글의 유치함은 때로 역하다. 가령 "꽃이 붉다."거나"꽃이 아름답다." 는 일반적인 표현은 풋내가 난다. 그러한 감상을 자신의 가슴으로 담아서 삮히는 과정이 없으므로 독자에게 공감과 감흥을 동조해낼수 없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자신만의 냄새가 되도록 발효를 시키고, 또 그것을 성의껏 그릇에 담아내는 정성이 필요하다. 시에 감동하거나, 초대된 상차림에 감동하는건 별 다를것이 없다. 발효된 깊은 맛없이 풋것들로만은 시의 초대상을 차리기에 한계가 있다. 3...<시에서 만큼은 ..모모인 척 하지 말라>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작품을 써나가야 한다 . . 무식한 놈이 유식한 척 유식한 놈이 무식한 천 하는 것은 정말로 역겹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절하(平價切下) 하거나 평가절상(平價切上) 하지 말라 그냥 솔직히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사족은 버려야 한다 . . 제발 .."척"하지 말라 . . 띄어쓰기나 맞춤법(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초고에는 신경 쓰지 말라)에 연연하지 말라...시를 망치는 요인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주어 의 남발..형용사의 남발은 하지 말라 . . "단지" "단..이것은 그럴 것이다" "무엇 만".... 이라는 한정적인 부사어도 자제하기 바란다 . . 지나친 생략이나 과장법의 남발...쓸데없는 도치법 어울리지 않는 은유법 한정적 물음의 물음표(?) 규정짓는 느낌표(!)물론 필요하다. 허나 자주 쓰이면 시가 풋내가 난다.. 발효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색깔로 지자면 보라색인 것이다. 아주 조금씩 쓰면 화려해 보이지만..너무 자주 쓰면 글이 천박해 보인다 . . 다시 한번 얘기해야 하겠다 제발 "척"하지 말라...시란 학력이나 배움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 그래서 국문과 나온 사람들이 시를 못쓰는 원인 바로 여기에 있다..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자면...시는 앎이나 思想만으로는 쓰여지지 않는다.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4...<시를 쓴다는 것은... > ..시를 쓴다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생명의 단면을 그려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 단면의 드라마를 이미지로 포착하여, 자신의 참된 목소리로서 외부에 건네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다. ..이 생명의 단면의 드라마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상, 자기와 타인과의 단순한 대립의 드라마가 아니고,(물론 방법론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존재와 不可知인 것과의 관계이다. 예를 들면 생과 사, 현실과 비현실과의 대립의 드라마이다. ..그 대립의 드라마를 베이터 라든가 죠이스가 말한, <계시의 순간>(에피파니)에 통합하고, 혹은 그 순간에 해체한다. 그것이야말로 시적 이매지네이션이 얻어지므로,그 시적 이매지네이션을 개념화한 유사한 형태의 시각에서 해방되어, 어디까지 투사 가능할까, 예감을 포함하여 어디까지 깊이 지킬 수 있을지를 의식 속에 넣어두고 닦아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항상 나 자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당위성을 넘는 것이야말로 시에 걸친 드라마는 비로소 메타피직에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 드라마와 형이상학의 일치야말로 궁극에 닿는 詩 그 자체가 아닐까. ..W.s 워콥은---마치 생과 사가 우리들 응시의 눈앞에 몇 분간, 좌우로 열려 밸런스를 잡는다. 이와 같은 상태가 예술이다---라고 말했는데, 시 그 자체에 이 말을 그대로 대입시킬 수가 있다. 이때 시인은 무엇에 의해 이 가혹한 응시에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죽음 속에서조차도 생을 끄집어 낼 수 있으니까.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가 시의 주제는 <생>과 <사랑>과 <죽음>이리고 썩 적절하게 말했다. 시에 있어서 주제를 찾아 이미지에 숲에 나눠 넣어, 잔가지를 자르고 구질구질한 것들을 제하고서, 그 정신에 도달하여 그 주체를 물을 때, 이 <생>과 <사랑>과 <죽음>의 전부, 혹은 그 안의 일부에라도 다다르게 될 터이다. 시가 문학이라든가 예술의 기본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를 잃어버린 시는, 시라고 부르기보다는 시와 비슷한 흉내일 뿐이다. ..이러한 의식 위에 서서 시를 써 온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묶는 모든 끈, 쇠사슬, 국경 등을 제거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5...<시에서만큼은 띄어쓰기를 무시하자 > 띄어쓰기 때문에 시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띄어쓰기를 함에 따라 의미는 천지차이로 달라지는데, 아래아 한글이나 일반 띄어쓰기에는 그런 것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를 않다. 그래서 잘못된 띄어쓰기로 하여금 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겨울 나무'와 '겨울나무'도 다르다. '겨울 나무'란 지금 겨울을 겪고있는 많은 나무들을 의미하지만 '겨울나무'라 함은 어느 대상에 겨울이 주는 외로움과 고독의 의식을 입혀 만들어낸 '단 하나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흙 먼지'와 '흙먼지'도 읽기에 다르게 느껴진다. '흙' 하고는 쉬고 '먼지'를 읽으면 그 쉬는 부분에서 흙의 느낌이 미미하게 사라지지만 '흙먼지' 하고 읽으면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글 97에서 '흙먼지'라 입력하면 빨간줄이 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에 너무 놀라 띄여쓰기를 하지는 말라. 이상은 아예 띄여쓰기를 안하고 붙인 것도 있지 않는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 전달을 위해서 시에서 만큼은 띄여쓰기는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하자. 의미나 운율 부분에서 좋은 시를 망치지 않으려면. |
내용출처 : [집필자 : dichro ] |
출처 : 詩人의詩
글쓴이 : 詩人의 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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