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스크랩] 도올고함/근대적 삶의 출발`진짜`모차르트 보고 싶은가

시인답게 2007. 7. 16. 23:10
[도올고함(孤喊)] 근대적 삶의 출발 ‘진짜’ 모차르트 보고 싶은가
신정아양의 사기극으로 온 세상이 벌집 쑤셔놓은 듯 웽웽거린다. 이 세상에 학위를 가지고 뻑셔대는 인간들의 본색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신양보다 더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얼마나 있으리오마는, 문제는 이 사회가 신양의 도덕성에 대한 단죄의 칼날을 무디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깡그리 사기와 허위와 허세로 인생을 살아버릇한 그녀의 자화상은 우리 시대가 부끄러워해야 할 경종이다. 인간을 서열화시키고 외형화시키고 학벌훈장으로 소외시켜 온 우리나라의 교육풍토가 양육해 온 인간들이 꾸며놓고 있는 그럴듯한 세계야말로 신정아양의 사기극의 독무대가 되기에 충분했다는 이 사실, 이 사실이 곧 우리 모두의 자성을 요구하는 우리 시대의 요추(要樞)다. 모두가 허위로 돌아가고 있는 판에, 허위가 하나 더 끼어본들 그 허위의 본색이 드러날 까닭이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허위로 돌아가고 있는 판에, 선거공약도 허위투성이요, 검증도 허위투성이인 이 마당에 한숨만 푸욱 푸욱 내쉬고 있을 셈인가? 이 울민한 심사를 훅 날려버리고 가짜 아닌 진짜 속에서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위대한 추억의 공간이 장안의 한복판, 세종로에 마련되어 있다.

많은 음악사가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였다고 평가되는 천재!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조차 “그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죽음”이라고 뇌까리곤 했던 그 천재,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잘츠부르크 궁정부악장이자 작곡자였다. 엄마는 안나 마리아(Anna Maria).

지난해 2006년은 그의 탄생 250주년이었고, 알프스산맥 북록(北麓)을 흐르는 잘차흐강(Salzach River)변의 분지 잘츠부르크는 1년 내내 모차르트 축제로 전 세계 애호가들의 발길이 집중되어 있었다. 잘츠부르크 박물관과 모차르테움이 주최한 “모차르트전”은 2006년 1월 27일부터 2007년 1월 7일까지 열렸는데,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에 60만 명의 관객의 발자취가 이어졌던 것이다.

그 세계적인 전시회가 몽땅 그 모습대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문의전화 02-2235-0006)에 옮겨졌다. 그 소중한 진품 200여 점이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모차르트의 머리카락, 친필 서한, 그리고 손수 쓴 악보들은 쿠리에들이 가슴에 품어 직접 나른 것이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서러움으로 말하자면 우리 평창 사람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이겠지만, 그래도 모차르트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그 설움을 우리보다는 더 쉽게 치유했을 것 같다. 설움 대신 모차르트, 그 인간과 음악을 나누어 갖자고 이 전시를 보낸 것 같다.

모차르트가 어릴 때 연주했던 바이올린 진품. 앞뒤가 다 통판으로 되어 있는 탁월한 악기라고 전문가들이 혀를 찬다. 알렉산더 마이어(Alexander Mayer, 1682~1750)가 제작한 명품을 도올 기자가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다.


천재의 삶은 항상 극화된다. 극화될 수 없는 삶을 살았어도 극화될 수밖에 없다. 극화를 통해야 그 천재성은 더 애절하게 우리 가슴을 저며오기 때문. 피터 섀퍼(Peter Shaffer)의 희곡에 기초한 영화 ‘아마데우스’의 극적 인상 때문에, 우리는 신의 총애를 독차지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여 십자가마저 벽난로에 던져버리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의 비극적 삶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실상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죽음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요제프2세의 총애를 받는 궁정작곡가로서, 당대 음악가로서 최고의 지위인 호프카펠마이스터(대악장)에 올랐으며, 실제로 그의 오페라 작품들은 18세기 후반의 유럽 사회를 풍미한 걸작들이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조차 최고의 평판을 누렸다. 그의 프랑스어 오페라인 ‘타라레(Tarare, 1787)’는 당대 이미 모차르트의 작품 ‘돈 조반니(Don Giovanni)’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

“아마데우스”라는 칭호는 “고트리프(Gottlieb)”라는 독일어를 라틴어화한 것인데,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만 허락하고 재능을 허락지 않았다고 신을 저주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살리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하이든과 베토벤을 가르쳤으며, 베토벤은 살리에리에게 ‘세 바이올린 소나타’(op.12, 1797)를 헌정할 정도로 그를 깊게 존경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신화적 이야기는 푸시킨이 1830년에 쓴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같은 이름으로 오페라를 썼다(1898).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골 기질의 모차르트 자신이 살리에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에는 ‘대주교(Archbishop)’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오늘날 로마교황청 체제하에서의 대주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의 관제의 명칭이며 실제로 작은 도시국가의 왕(王)을 의미한다. 잘츠부르크는 서쪽으로 바이에른, 동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영토 사이에 끼여 있었지만 13세기부터 대주교가 통치한 반독립적인 작은 나라였다.

따라서 음악가로서 산다는 것은 대주교의 궁정악사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대주교가 그를 인간적으로 모독하고 하대하자 궁정악사로서의 모든 직책을 거부하고 최초의 프리랜서가 되었다. 순전히 작곡에만 의존하여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꿈이었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못했던 용단이었다. 로마인들이 희랍 조각에서 예술적 동경의 원형을 발견하듯이 우리 현대인들은 근대의 원형을 모차르트의 생애와 예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서구 근대의 출발이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격동 시기에 생애를 마감했다.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에 626곡(쾨헬번호 KV)을 썼다. 자장가에서 장송곡까지. 이 양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악보 여섯 장은 매일 끊임없이 써야 하는 분량이다. 그런데도 아마데우스는 잘 놀았다. 밤새도록 춤추고 새벽에나 집에 들어왔고, 작곡료는 모두 도박으로 날렸다. 당구, 카드, 사격의 도사였다. 그리고 수학의 천재였다. 그리고 귀족들 앞에서 궁둥이를 까대는 습관이 있었다. 상류사회에 대한 경멸의 한 표시였을 것이다.

지금 세종로에 가면 250년 전의 모차르트가 궁둥이를 까고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라! 잘츠부르크에서 온 맛있는 포도주와 초콜릿이 같이 기다린다는 것도!
 
“시작은 아주 단조롭고 코믹했지. 조용히 들려오는 바순과 바셋 호른 소리, 마치 녹슨 스퀴즈박스 같은. 갑자기 오보에의 높은 음이 들리더니… 그 여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클라리넷 소리가 들려왔지. 감미로운 소리가 점점 환희로 바뀌어갔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 동경으로 가득 차있었소.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기분이었소.”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한 독백.

나 도올은 말한다.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는 한 찰나의 정체(停滯)조차 거부하는 천재의 변화무쌍한 표정, 그 심오한 희로애락의 천뢰가 들어 있다.”

 

 

출처 : 트레킹이 읽는세상
글쓴이 : 트레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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