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무문관 수행 - 전국 20여곳 60여수좌 용맹정진

시인답게 2009. 4. 8. 13:01

무문관 수행 - 전국 20여곳 60여수좌 용맹정진
독방서 화두와 씨름 ’부처되기’ -일종식 죽기 각오 정진

’이 자리에서 깨치지 못한다면 일어서지 않으리라.’
겨우 몸 하나 움직일 만한 공간.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년이고 바깥 세상을 피한다. 아예 출입을 하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버리거나 못질을 해버린다. 독방은 가로 한칸, 세로 두칸 크기의 좁은 공간이다. 수세식 좌변기와 간이 샤워기가 설치돼 있고 상하기 쉬운 음식물을 넣어둘 수 있는 작은 냉장고도 한 대 있다.
하루 한번 문 아닌 문을 연다. 매일 오전 11시 방마다 유일하게 외부와 통하는 작은 공양구(供養口)가 열리고 시봉(侍奉)을 맡은 스님이 공양통에 담아 식사를 넣어준다. 물론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독방은 다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침묵속에 빠져든다.
이를 흔히 ’무문관’ 수행이라고 부른다. 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임을 자부하는 한국불교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도를 구하는 이도 드물어 불법이 쇠퇴하며, 교만과 시비가 넘치게 된다’는 말법(末法)시대, 승가의 수행기풍과 위계질서도 날로 흐트러지고 있다. 그러나 매년 동, 하안거 결제 때마다 수천여명의 스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가운데 ’무문관’ 수행의 전통이 제방의 선원과 토굴에서 되살아나고 있으니, 불교 중흥의 서광이 비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문관’은 원래 중국 송나라 선승인 무문 혜개(無門慧開)가 지은 책(<선종무문관>이라고도 함) 이름. 깨달음의 절대경지를 ’무(無)’라고 표현하고, 이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한 책이다. <무문관>은 고인(古人)의 선록(禪錄) 중에서 공안 48칙(公案四十八則)을 뽑고 여기에 평창(評唱)과 송(頌)을 덧붙였다. 이 48칙의 총칙(總則)이라고 할 제1칙 ’조주무자(趙州無字)’에서 저자는 무(無)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 부르고, 이 일관을 뚫고 나아가면 몸소 조주(趙州)로 모실 뿐 아니라 역대 조사(趙師)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더불어 견문을 나누는 즐거움을 같이 하게 된다고 한다.
조주(趙州)스님에게 한 학인이 "개(狗子)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없다(無)"고 대답했는데, 이때의 ’무’란 세상에서 말하는 유에 대한 상대적 ’무’가 아니라, 유무의 분별을 떠난 절대적 ’무’를 가리킨다는 뜻에서 책의 제목이 유래했다.

물론 문을 닫고 정진하는 ’폐문 정진(閉門精進)’법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중국의 조주, 고봉스님 등이 죽기를 각오하고 정진했다는 ’사관(死關)’도 무문관 수행의 일종이었다. 지난해 10월 한중일 국제 무차선 대회에서 중국 대표로 참석한 조주원 백림선사 방장 정혜 스님도 폐관(閉關) 정진하는 무문관을 두고 중국 선종의 중흥을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말 경허 스님이 동학사에서 폐문 수행하고, 일제시대 효봉 스님이 금강산 신계사 선방에서 3년간 두문불출하며 정진한 것도 무문관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에서 정영스님이 ’무문관’이라는 참선수행도량을 세우면서부터다.
부처님의 6년 설산 고행을 본받아 65년부터 79년까지 매회 6년간 현대의 고승들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고 면벽 수행했던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 용맹정진의 상징과도 같았던 천축사 무문관은 79년 원공스님(천축사 주석)을 끝으로 문을 닫았지만(현재는 시민선방으로 운영), 93년 계룡산에서 다시 ’문없는 문’이 열렸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잡은 갑사 대자암 무문관. 천축사에 처음으로 무문관이라는 수행 기풍을 세운 정영스님이 20여년의 정성으로 조성한 ’삼매당(三昧堂)’이란 이름의 선원이다.
3층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지만 화장실을 갖춘 아담한 방이 12칸, 수좌들은 빈 몸으로 들어간다. 하루 한끼만 먹는 일종식에 묵언정진은 기본, 의사소통은 필담으로 이뤄진다. 세속 기준으로 보면 형무소의 독방보다 더 처절하다.
삼매당에는 보통 비구니 몇 명을 포함한 12명의 수좌들이 5개월의 과정으로 용맹정진한다. 10여년의 전통을 쌓아오면서 매번 1명씩, 10여명의 거사 수행자도 무문관 수행에 동참했다. 삼매당 옆 시민선방(十方堂)에서는 이런 용맹정진의 기운 탓인지 거사, 보살 20여명이 스님들의 수행열기를 따라 정진중이다.

대자암에 이어 94년 문을 연 무문관은 제주도 남국선원(선원장 혜국스님). 현재 7명의 수좌들이 정진중이다. 수행하기 좋은 환경을 갖춰 2007년까지 접수가 끝난 상태. 수행기간은 6개월 또는 1년이 기본이나 연장이 가능하다. 수행자의 법랍은 평균 20년이상으로, 정진력을 검증받지 않고는 입방이 힘들다. 안거 때는 30~40여명의 재가자들도 시민선방에서 정진한다. 차세대 선지식으로 이름이 높은 혜국스님이 정성스럽게 수행자들의 성취를 기원하며, 뒷바라지 하고 있다.

98년 여름에는 설악산 백담사에도 ’무금(無今)선원’이란 이름으로 무문관이 생겼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 으로 풀이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선원은 적막한 나무숲에 파묻혀 있어 수행하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화장실까지 갖춘 두평 정도 방이 12칸. 근기가 허약한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들이지 않는다. 비구계를 수지하고 10안거(安居) 이상을 해 본 스님만이 들어갈 수 있다. 98년 하안거때부터 3개월과정으로 문을 열었지만, 2000년 4월 15일부터는 3년과정으로 5안거 이상을 지낸 9명의 스님이 정진해 2002년 4월 중순에 해제식을 가졌다. 2002년 하안거부터는 8명의 수좌들이 3개월과정으로 정진하고 있다.

2001년 4월 10일에는 강진 백련사(주지 혜일)도 처음으로 무문관 입재 방부를 받았다. 1억5천여만원의 예산으로 건립된 백련선원은 건평 40평에 5개의 독방이 갖추어져 있으며, 욕실과 철저한 방음시설 등을 갖춰 오랜 기간의 무문관 수행에도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했다. 백련사는 입방비를 받지 않는 대신, 참선수행 경험과 신심 등 수행요건을 갖춘 재가자들을 입방토록 해 수행붐을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2001년 통도사 백련암 죽림굴(竹林窟)에서 3년간 독방 좌선을 마친 원산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처럼 토굴에서 수행하는 스님들도 적지 않다. 수좌들은 봉정사 지조암, 태백산 도솔암 등 무문관 수행을 하는 토굴과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포함하면, 무문관은 20여곳은 될 것으로 추산한다. 이를 다 합치면 무문관 수행자는 60여명에 달하며, 매년 안거에 드는 2,000여 수좌의 3%에 해당한다.

무문관 수행은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 잠자지 않고 참선하는 ’용맹정진’과 함께 가장 어려운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문관에 방부를 들이려는 수좌들은 줄을 잇고, 무문관을 개설하려는 선원도 늘고 있다. 문경 봉암사와 충주 석종사를 비롯, 비구니선원이 있는 울산 석남사도 무문관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대자암에서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나온 한 수좌스님은 "선방수행은 결제기간에 쫓겨 중단되기 쉽지만, 무문관 수행은 정진력이 붙을 때까지 치열하게 몰아붙일 수 있다"며 "중국에도 사라진 무문관 수행이 이제 한국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수좌들은 예나 지금이나 관문을 돌파해야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테지만, 그 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없는 문’을 투과하려는 대발심이 지금 이 순간 전국의 참선 도량에도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불교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현존하는 무문관 수행자들>

1964년 천축사 주지 정영스님은 선객들이 참선도량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듣고 무문관의 필요성을 절감, 처음으로 천축사에 공식적인 무문관을 개설했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6년 결제에 들어갔는데, 2회차를 마친 후 79년까지 100여명의 수좌들이 방부를 들였지만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스님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나 규칙이 엄했기 때문에, 보문 관응 구암 제선 현구 지효 경산 도천 관묵 천장 도영 석영 무불 원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만이 이름을 남겼을 정도다.
당시 수행 참가자 가운데 현존하는 스님은 관응(직지사 조실) 도천(화엄사 조실) 구암(하남 광덕사 주석) 원공(천축사 주석)스님. 범어사 금오선원과 강원에 주석했던 대강백 지효스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이름없는 토굴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다 입적했다.
조계종 명예 원로의원인 관응스님은 천축사 6년 면벽수행을 마친 후 당대 최고의 강백이자 선승으로서 직지사 천불선원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역시 조계종 원로의원인 도천스님은 대둔산 태고사에서 40년간 두문불출하며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청규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남 광덕사에 주석하는 구암스님은 66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제방의 선원에서 참선만 해 온 절구통 수좌로서, 모든 소임을 마다하고 작은 절에서 수행에만 매진하고 있다.
천축사 무문관의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스님(천축사 주석)은 23년간 1년의 절반 이상을 꼬박 ’만행’(기별도 전하지 않은 채)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단 한차례도 차를 타지 않고, 갈아입을 옷 두벌만을 지닌 채 끝없는 만행을 하고 있다. ’산에 도라지를 심는 사람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고, 북한동포 돕기 운동도 벌여왔다. 스님은 2002년 2월 28일부터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출발해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개최 도시 20곳을 걸어서 순례하는 ’환경과 평화를 위한 평화도보 대장정’을 회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