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함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
이형산의 <황소의 삶>은 범상함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보아진다. 사실 이 시는 하마터면 범상함에 머물렀을 뻔하였다. 텍스트를 검토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늘 짊어진 것은
멍에였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고삐였다
그의 유일한 장식품은
신발도 아닌 코뚜레였고
그가 생각을 바꿀 때마다
걸고넘어지는 것은 장식품이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바람 불 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황톳길이었고
한평생 발 디디고 다닌 곳은
발 빼기 힘든 질퍽질퍽한 땅이었다
그가 파헤친 것은 돌부리 가득한
비탈진 곳이었다.
그는 평생을 말하지 않고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눈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잠에서 깰 때마다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리던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다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 이형산 '황소의 삶' 전문
총 4연으로 된 이 시는 1연과 2연이 끝나도록 독자에게 인상적인 어필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소의 일반적 이미지를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성질이 급한 독자라면 1연 정도를 읽고는 "별 내용이 없구먼"하고 감상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필자 또한 하마터면 그런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다.
이런 이유로 시에 있어서도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처럼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을 전략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대인은 너무도 바쁘기 때문에 도대체가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미덕을 별로 발휘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상해 보이던 이 시가 3연에서 변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연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된다. 인내 있게 읽은 독자라면 이 마지막 연에 와서 가슴 찡한 울림을 느낄 것이다. 시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마지막 연의 반전으로 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면서 우리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는 것이다.
시적 감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적 대상이 일반적인 의미망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나 감각으로 다가올 때 우리가 느끼는 쾌감이 아니겠는가? 이 시를 예로 든다면 범상하던 황소의 이미지가 마지막 연에 와서 나의 이미지, 다시 말하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가장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공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이 단순한 반복이 더욱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실상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수없이 자신을 거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황소의 삶을 우리 모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연민의 감정이다. 이 자기연민의 감정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자신을 다독거리게 만든다.
잠에서 깰 때마다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리던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다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시인은 황소의 삶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나약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 같다.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보다 더 강한 긍정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는 오히려 시인의 마지막 진술에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읽고 싶다. 작금의 우리나라 시단에서 필자는 이 정도의 시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고 본다. 특히 이 시는 성공한 민중시로 분류할 수도 있는 바 생경한 구호가 난무하는 민중시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필자는 글머리에서 일반적인 황소의 이미지를 나열한 것을 다소 부정적인 뉴앙스로 말하였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그것이 이 시를 돋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일반적인 황소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중섭의 그림에서와 같은 저항적 이미지를 담았더라면 투쟁적인 시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공감은 획득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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