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방

詩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시인답게 2006. 2. 27. 17:29

1. 詩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詩란 무엇인가'하는 논제에 대하여는 이미 동서고금의 유수한 석학들이 다각적인
시점으로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詩를 정의한 역사는 誤謬의 역사였다'라고 한
엘리어트의 말을 여기에 다시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내린 詩의 정의는, 각각
詩의 총체적 파악을 위한 부분적 협력은 할 수 있었을지언정 詩가 무엇인가를 단적
으로 집어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 언뜻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하겠다.
'삶' '죽음' 혹은 '사랑'에 대해 우리 각자가 내린 결론은 그 어느 것도 완전히 틀
린 것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완전무결한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그만큼 거대한 부피를 가진 것인 동시에, 영원한 가치를 가진 과제이
기 때문일 것이다.
'詩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이 불가능한 것도 이와같은 연유에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孔子의 말은 詩의 성격, 詩의 가치, 그리고 詩의 효용을 포괄적으로

설명한 것인 동시에, 비교적 명확하고 유력한 詩의 정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위의 말에 근거하여 생각한다면 詩는 첫째 認識이라고 말할 수 있다.
'可以觀'의 '觀'은 '본다' 즉 '안다',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물의 이치와
형태와 정신을 통찰하고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볼 수 없음은 盲目이며
無知인 동시에 오해와 혼돈을 불러 오는 근원이 될 수 있다.
'可以興'의 '興'은 감정의 충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興의 경지는 神明과 陶醉를
부른다. 워즈워드는 詩를 '범람하는 감정의 자연적 발로'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可以興'의 세계와 상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일 시의 세계에서 감정의 충일,
곧 흥의 범람을 제외시킨다면 시는 의미만 무성하고 정서의 촉발력이 없는 암호처럼
무서워 질 것이다.
감정적 정서적 흥취를 중시하는 詩의 세계는 다시 주변의 어느 누구와도 유대감과
친교로 어울릴 수 있는 '可以群'의 원만한 인격을 지향하게 한다. 타인과 무리를
지을 수 있고 거기 함께 어울릴 수 있음은 곧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인격의 실현을
말한다. '可以群'은 곧 자아의 내부에 세계를 용납하고 세계의 안에 자아를 투여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詩는 정직하고 진실한 내심을 표출하는 '可以怨'을
가능하게 한다.
'怨', 곧 '원망'은 표면적으로 볼 때 인내와 수양의 한계를 드러내는 태도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可以怨'의 세계에는 오히려 아무런 감정의 殘渣가
없게 되므로, 정화하고 증류되어 투명해진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이 가능하게 한다.
끝으로 공자는 詩를 공부하는 일이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겨
겸허와 예도를 깨우쳐 주는 동시에(邇之事父 遠之事君),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하는(多識於鳥獸草木之名) 덕목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시가 곧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임을 역설하는 말인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알고 상하의 예를 알고 거기서 정서적 흥취를 깨치는 것은 모두 사랑에
그 정신의 근원을 두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詩는 진실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에 뻗쳐 있는 생명의 윤기와
같은 것이다. 詩의 제작 동기부터가 열정, 혹은 충격이라고 하는 일종의 사랑이며
작품으로 완성된 한 편의 詩가 또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詩만이
독자를 감동시킬 힘을 가지게 된다. 감동이란 사랑으로 완성된 작품에서 독자가 누리
게 되는 정신적 쾌락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詩 속에 담긴 신비로운 마법이 독자를 감동시키며 내용과 융합을 이룬 그 형식의
아름다움이 또한 독자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이 감동은 독자를 순화하고 교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우리가 詩의 두 가지 효용에 대하여 논할 때 흔히 교훈설과 쾌락
설로 압축하게 되는데 그 교훈과 쾌락은 바로 '감동'이 생산해 내는 양면성인 것이다.
시에서의 감동은 깨달음을 동반한 정신의 만족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詩는
생명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그 감성에 투사된 모든 대상의 생명을 顯現하여서 시인 자신의 생명과 함께
타인의 생명을 옹호하고 긍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생명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생명을 긍정할 수도 없으며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Moulton은 詩와 散文을 創作文學과 討議文學이라고 각각 구별하였다. 즉 詩는 기존의
세계에 새로운 창조로서 플러스하며, 산문은 이미 있는 세계에 대한 논의로서 사물의
뜻과 성질과 가치와 목적에 관하여 설명하는 일체의 문장이라는 것이다.
시 곧 'Poetry'의 원래 의미도 창작을 뜻하며 시인을 지칭하는 'Poet'는 Mak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우리는 유의하게 된다. 시인은 상상적 우주의 창조자이다.
그리고 그 상상적 창조의 언어문학적 표현을 우리는 詩, 곧 문학이라고 부른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