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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10) / 정진규편

시인답게 2007. 8. 27. 18:14
심검당(尋劍堂)에서  /  정진규



  명산에 들면 보인다 어김없다 단서(端緖)를 잘 잡고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씩 있다 붓끝과 같다 하여 그 첨단을 필봉(筆鋒)이라 이른다 너의 단서에 내 혀를 나의 단서를 처음 댔을 때 그토록 와서 닿았던 우주의 뜨거운 율단(律端),  떨리던 필봉과 필봉 그게 모든 사물에게도 꼭 하나씩 꼭지로 솟아있다고 믿는 단서(但書)로 나의 시들은 그간 씌어왔음을,  내 사랑의 단초도 그러하였음을 시력 좋은 분들은 찾아 읽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저 단서(但書)로 끝나고 있는 것들 또한 추려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요새는 도처에 잡히지 않는 단서(端緖) 투성이다 보이지 않는 것 투성이다 나도 애를 먹고 있다 백내장 수술도 했다 했으나 신통치 않다 헛것만 보인다 필봉이 솟지 않는다 어제 오늘 내리는 난분분(亂紛紛)의 춘설(春雪)들 눈송이 하나에도 단서(端緖)가 있는 법이어서 저리 난분분을 지으는 것인데 형상을 보이는 것인데 그 속에서도 산수유꽃 노오랗게 치를 떠는 것인데 나도 치를 떠는 것인데 우수 경칩도 지났다 지척인 봄, 어디 갔느냐 심증은 잡았다 물증을 잡아야 하리 단서를 얽은 단서를 끊어내야 하리 다른 길 없다 심검(尋劍)이다 칼을 찾아라!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경이롭다”

 칠순 앞둔 시인의 한결같은 시 세계


 한결같다.  정진규 시인을 말할라치면, 반드시 ‘한결같다’란 형용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여 올해도 한결같이 시작한다.


 정진규 시인은 이번에도 미당문학상 최고령 후보를 차지했다. 최연소 시인의 나이는 해마다 낮아지는데 최고령 시인은 해가 바뀌어도 한결같다. 그래도 언짢은 기색이 없다.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한결같은 반응이다.


  시인의 활동은 올해도 왕성했다. 37편 발표. 달마다 시 3편씩 꼭 썼다는 얘기다. 형식에서도 변함이 없다. 행갈이나 연갈이 없이 1행 1연을 고집한다. 글자수도 500자 안팎을 늘 지킨다. 마침표는 올해도 보이지 않는다. 20년 넘도록 시인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의 시에서 마침표가 사라진 건 84년 발표한 6번째 시집 『연필로 쓰기』에서부터다.


  시 안으로 들어와서도 시인은 한결같다. 사물의 고갱이를 찾으려 부단히 궁리하고, 세상만사는 모두 이어져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자세와 믿음으로 시인은 시 앞에 앉는다. 앞서 인용한 ‘심검당에서’는 시인의 경결(硬結)한 마음가짐이 잔잔히 배어나는, 시인의 자천작이다.


  시를 관통하는 시어는 단연 ‘단서’다. ‘단서(端緖)’가 6번 등장하고 ‘단서(但書)’가 2번 나온다. 시를 지배하는 정조는 앞의 ‘단서’다. 뒤엣것은 ‘조건’이란 뜻으로 앞엣것과 단지 음만 같다. 시적 효과를 위해 동음이의어를 구사했을 따름이다. 사전은 단서(端緖)를 ‘어떤 일의 시초’라 이르지만 시인은 사물의 핵(核)으로 난 어귀쯤으로 해석한다.


  ‘단서’와 같은 뜻으로 쓰인 시어도 있다. 시인은 붓끝이 창조하는 무한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안다. 산봉우리(峰)를 붓(筆)에 비유한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필봉(筆峰)’은 단서와 같은 말이 된다. 단서와 필봉 모두 세상의 참 진리를 향한 첫 걸음인 셈이다.


  시인은 그 단서를 잡고 싶다. 힘차게 솟은 필봉을 보고 싶다. 그런데 요즘 영 신통치 않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다. 단서를 얽는 단서만 있을 뿐이다. 하여 시인은 외친다. 칼을 찾아라(尋劒)! ‘심검(尋劒)’은 번뇌를 끊는 반야검, 즉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의미의 불교용어다. 그렇다. 시인은 지금 삶의 지혜를 찾아 나섰다.


  시인은 이제껏 자신의 시학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했다. 만물은 이음의 관계에 있다는 ‘시의 연기본성론(緣起本性論)’이 그 하나고, 육화(肉化)된 언어를 부리기 위해 20년 가까이 붙들고 있는 ‘몸시(詩)’ 연작이 다른 하나다.


  그러나 앞선 모든 주석은 종심(從心)을 앞둔 시인 앞에서 그저 부질없다. 중요한 건, 시인이 한결같다는 사실이다. 한결같다는 건 낡거나 쇠퇴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다시 말해 젊고 새롭다는 말이다. 이제는 삼라만상이 눈에 익었을 법도 한데 시인은 “여전히 세상을 경이로이 바라본다”(문태준 예심위원). 그래서 한결같다고, 올해도 적는 것이다.   - 손민호 기자



출처 : 트레킹이 읽는세상
글쓴이 : 트레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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