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꽃과 가족과 연인 그리고 시(詩)를 위해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시인에게 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마도, 시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꽃만큼 많이 시의 소재가 된 것도 없을 것이다. 시인 묵객에게 꽃은 막막한 그리움과 하염없는 기다림의 상징이었고 열렬한 사랑과 서러운 이별에 대한 은유였다. 우리는 장미 하면 릴케를, 국화 하면 서정주를 떠올린다. 봄만 되면 우리 귓가에 들려오는 노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는 김동환의 시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는 박목월의 시다. 김원식도 국내 시인들 가운데 꽃을 즐겨 노래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치열하다
참매미 목쉰 울음소리
교교한 달빛 끌어 덮고
배롱나무꽃 숨이 차다
우두망찰 서 있는 그대여
꽃무릇 눈두덩이 터진다
―「가을 서곡」 전문
가을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참매미가 가을이 가고 있다고 온몸으로 울어대기도 하지만 시인은 배롱나무꽃이 교교한 달빛을 끌어 덮고 숨이 차 하니 가을이 온 것으로 여긴다. “우두망찰 서 있는 그대”는 배롱나무이리라. 아니면 화자의 연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겠다. 꽃무릇은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7〜9월에 담자색 꽃이 핀다. 꽃무릇의 눈두덩이 터지든, 꽃무릇을 보고 눈두덩이 터지는 아픔을 느끼든,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됨을 시인은 참매미의 목쉰 울음소리와 배롱나무꽃과 꽃무릇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이니,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 시인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자목련을 다룬 두 편의 시를 보자.
목적어가 필요 없는 꽃봉은
수식어 같은 이파리도 사치다
오직 사모, 주어만 필요하다
허공의 행간을 겨우내
서리꽃 목필로 채운 뜻,
숭고한 사랑의 징표 때문이리라
황홀한 수줍음 여전한 너,
두 손 번쩍 들고 마중하다가
4월 첫 자리에 홍자색 연정
죄 엎지른 네 설렘을 알겠다
자지러지듯 고혹적인 점등식
혼절한 단문, 자목련을 읽는다
―「자목련을 읽다」 전문
자목련 자체가 한 편의 시다. 목적어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주어는 사모(思慕)다. 시의 소재는 자목련이다. 자목련은 “숭고한 사랑의 징표”이면서 “홍자색 연정”을 뜻한다.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전령사인데, 시인은 “자지러지듯 고혹적인 점등식”을 보고 “혼절한 단문”인 자목련을 읽어낸다. 아니, 자목련을 읽고 혼절하고 만다. 오직 꽃봉 하나로 할 말을 다하는 자목련이 엎지른 죄가 무엇일지, 상상의 공간이 확대된다. 죄와 설렘을 동반한 채 아슬아슬한 경계를 밟는 곳, 시인은 그 지점을 자목련의 몸을 빌려 다녀왔다. 그러기에 자목련을 한 편의 시로 둔갑시키는 놀라운 분장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데, 4월 자목련 꽃그늘 아래서 다음과 같이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쓴다. 이번에는 자목련이 진다.
자목련 툭, 지는 날
너무 늦게 나에게 묻는다
네 마음의 묵정밭엔
무엇을 파종할 것이냐
저문 바람이 뿌린 시(詩) 한 톨
허공의 정원에 살별로 뜬다
―「4월 꽃그늘 아래서」 전문
자목련이 지는 날, 자문해본다. 꽃도 졌는데 화자는 이제 마음의 묵정밭에 무엇을 파종할 것인가. 바람이 뿌린 시(詩) 한 톨이 “허공의 정원에 살별로 뜨”니, 화자는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던 존재가 사라지자 시인은 빈자리를 절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또한 비어 있다는 자각, 그곳에서 싹 틔울 한 톨의 시가 절실해지는 이유다. 4월의 꽃그늘 아래에서 맞이한 밤, 밤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시 쓰기다. 오이도에 가서 해당화를 보고는 “시의 눈물로 부르는 마지막 사모곡이다”(「해당화 별곡」)라고 한 것도, 시와 꽃을 동일시한 시인의 자연관 덕분일 것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고 꽃은 신의 창조물이다. 시인을 짧게 발음하면 신이 되고 신을 길게 발음하면 시인이 된다.
세상의 낮은 곳에만 켜는 하얀 꽃등은? 민들레다. “달무리 진 시름 한 조각을/삯바느질 중인/새벽 한 시의 등잔불”은? 달맞이꽃이다. “등 굽은 달빛이 물 위에 그린 자화상”은? 이것도 달맞이꽃이다. “삼동에 속곳이 비치도록/붉게 우는” 꽃은? 동백이다. 이와 같이 꽃에 대한 해석이 아주 재미있다.
갈 곳 없는 봄날
수런거리는 앞산에 들었습니다
농을 치는 조팝꽃 난장에
온통 넋이 팔려 있을 때
전화가 온 건 그때였습니다
‘고추 꽃잎은 몇 장이야?’
참 뜬금없는 살가운 안부입니다
―「고추꽃처럼 피어나다」 전반부
여기까지 읽을 때만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수런거리는 앞산에 든 존재가 고추인 것 같은데, 조팝꽃이 “고추 꽃잎은 몇 장이야?” 하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는 것인가?
건들건들 태연한 척 살아온 날들
비련의 종소리 아직도 깊은데
습벽처럼 마음이 무너지는 날,
그립지 않을 만큼 간격을 두고
조붓한 그대의 기억을 걷습니다
가까이 있어 멀리 두어야 할 사람
내 그리워하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그 수척한 그리움, 잊고 살아도
고추 꽃잎 수줍게 웃고 있는 날
시침 떼듯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고추꽃처럼 피어나다」 후반부
고추 꽃잎이 의인화되어 있다. 그 꽃이 조팝꽃을 닮았기에 이 시의 의미는 깊어진다. 숲속에 들어서야 볼 수 있는 꽃, 시인이 사는 곳과 적당한 거리에서 피어나는 꽃이 조팝꽃이다. 그리운 사람이기에 오히려 간격을 두어야 하는 현실을 조팝꽃에 비유하였다. 텃밭에 심은 고춧대에 고추꽃이 핀 날 문득 고요한 숲으로 가 조팝꽃을 혼자 만나는 마음이 애잔하다. 수줍게 웃고 있는 고추 꽃잎처럼 시침 떼듯 다시 피어날 것이라고 하니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화자의 심사를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어 멀리 두어야 할 사람/내 그리워하지는 않을 작정입니다”는 아름다운 역설이다. 이제 제4회 천상병 문학제 〈귀천문학상〉 수상작을 보자.
오메, 징한 것
세곡동 사거리에 꽃마을이 있는데요
백목련 자목련은 속곳 벗고 허공에 들었고요
개나리 진달래는 하필 능 섶에 늘펀히 있다요
아따, 그뿐 아니고요
홍매화 살구꽃은 앞니 훤한 어르신 뜰 앞에서
홍홍홍 웃음을 참느라 키득대고요
첫 햇살로 세안한 연초록의 구애에 나는,
이내 자결한 향기처럼 길을 잃고 말았는데요
인생사 일장춘몽, 연신 혀를 차시던 할매
화무십일홍, 흰머리 소년과 바람이 나서는
이 잡것들아 거시기
그래도 봄날, 꽃 사태는 보고 살라 딴청이네요
근디 이건 또 머라요
산모롱이 저 함초롬한 꽃다지며 민들레꽃
해필 개나리 앞을 까치발로 서성대는 이유며,
자목련 그늘 아래 제 자태를 뽐내던 제비꽃
뒷감당 어쩌려고 색깔로 견주자 깐죽대는지요
이렇게 대책 없는 봄날,
영산홍 치마폭을 한사코 들치던 지빠귀들이
봄날의 금침 속으로 날아간 뒤, 저마저
춘정을 끌어 덮고 작심하고 누워버렸지요
인자는 님도 몰라요
행여, 제가 그립다면 사월의 사거리로 오셔서
한 열흘 곁에 누워 그냥, 꽃 이름도 묻지 마세요
바람의 손으로 꽃잎을 내리는 날까지
꽃동산 난장 아래 사랑도 詩도 잠시 내려놓자고요
―「사월의 사거리를 아시나요」 전문
세곡동 사거리의 꽃마을에 온갖 꽃이 다 피어 있다. 흔히 하는 말을 빌리자면 ‘앞을 다투어’ 피어 있다. 사계절 구분이 뚜렷하던 시절에는 시간을 따라 차례로 피어나던 꽃들이 요즘에는 불꽃 터지듯 한꺼번에 피어난다. 그런 거리에 생기와 활기와 관능과 천진스러움이 넘친다. 게다가 막 돋아난 연초록 잎의 구애에 시인은 그만 길을 잃는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이끌림, 그때 짐짓 길을 잃고 꽃을 찾아가는 나비처럼 좀 비틀거린들 어떠랴. 봄꽃들의 흥성거림에 같이 취해본들 어떠랴. 그러나 한편에서는 봄꽃을 보면 더욱 서러운 이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으려나’ 하면서, 봄을 맞이한 것이 서러울 것이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며 연신 혀를 차던 할매는 “이 잡것들아 거시기” 하면서 꽃들을 애써 외면하려 든다.
시인이 사월의 꽃마을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체들의 생명력이다. 암과 수가 만나서 관계를 맺고 번식을 하는 것은 생명의 이치다. 그런데 시인은 꽃들과 새들이 한껏 생명력을 뽐내는 꽃동산 난장 아래 사랑도 시도 잠시 내려놓고 꽃구경이나 즐기자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꽃이 다 생명력의 상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시연꽃을 보며 고인이 된 어떤 분을 생각하기도 하고 등나무꽃이 핀 밤에 5월의 광주를 생각하기도 한다.
지당한 함성들이 허공에 피었다
그렁한 육신을 말리며
산울림이 된 외침들이
포도 알갱이처럼 다시 뭉쳤다
진즉 화석이 된 혈흔 위에서
폐허의 시간들이 종소리로 운다
달빛가지에 등나무꽃 걸던 날
함부로 타협한 고단한 주검들이
망월동 표석처럼 저리 서 있다
자식 잃은 바람이 안부를 묻자
목청 잃은 새가 되어
총성 뒤로 숨은 심장을 쪼고 있다
바느질 당한 기억의 도시에서
세월의 앞잡이가 된 나,
명멸하는 진실에 난사를 당했다
오월의 눈빛과 달빛 사이로
자줏빛 함성 카랑하게 필 때
역사의 경계 밖으로
나는, 유배당했다
―「등나무꽃 달빛 아래」 전문
어느덧 35년 전의 일이 되었다. 시인은 광주 시내 등나무 달빛 아래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린다. “화석이 된 혈흔 위에서/폐허의 시간들이 종소리로 운다”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만 흘러온 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스스로를 책한다. 등나무꽃 하나하나는 그렇게 사라져 갔던 목숨들이라 할 수 있을까? 어느덧 역사가 된 비극을 등나무꽃 달빛 아래서 곱씹어보며 가슴을 치는 시인의 역사의식에 동참하게 된다. 「개망초」 「청매화」 「나팔꽃」 「복수초」도 편편이 의미가 깊지만 「섬 뜰 마을」 같은 작품은 서정과 서경이, 인간과 자연이, 꽃과 꽃말이, 뭍과 바다가 조화를 잘 이루며 펼쳐져 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런 시야말로 순수서정시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스러져 가는 것들은
분명 절정일 때가 있었을 것이다
무갑산 홀딱새 울음소리에
부스스 일어난 섬 뜰 강물들이
자작나무숲을 걸어 나오는 햇살을 마중한다
그때쯤 아내와 함께
남한강 푸른 백로 소리로 귀를 씻으며
꽃의 고요 속을 산책한다
초롱꽃 종소리 은은한 날
산안개 머리를 감는 강가에서
바람의 장단을 치는 각시붓꽃을 만난다
―「섬 뜰 마을」 전반부
무릉도원이라고 할까 별유천지라고 할까,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 같다.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백로 우는 소리가 환상적인 화음을 이룬 곳, 그곳에서 화자는 아내와 함께 “남한강 푸른 백로 소리로 귀를 씻으며/꽃의 고요 속을 산책한다”. “사람도 꽃들의 어깨가 되어 섬 뜰에 절정의 향기가 굽이치면 좋겠”지만 그 꿈은 남가일몽이리라. 하지만 인간은 꿈을 꿀 줄 알아야 한다. 시를 통해 꾸는 꿈, 그 꿈을 혹자는 백일몽이라고 하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꿈이 없다면 낙타 없이 사막을 걷는 것이다. 꽃도 못 보고 봄을 넘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칭찬도 화를 내며 하셨다
전교 우등상을 받던 날
궐련을 물며 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노름판에 논밭뙈기 싹 날려 불고
저것을 어찌 갤켜. 먼 조화여 시방.”
눈보라에 빈 장독 홀로 울던 새벽,
몰래 생솔가지로 군불을 때주시며
한숨이 구만구천 두이던 아버지는
자식 사랑도 당신 타박으로 하셨다
사립문 옆 헛청에 나뭇짐을 부리며
시침 떼듯 진달래를 건네주던 당신께
나의 숨김은 하나만은 아닌 듯하다
구들장 틈으로 새는 연기를 참으며
자는 척, 당신의 눈물을 본 것이요
꼭 탁한 아비가 된 나를 본 것이다
아직 서슬 퍼런 지청구는 여전한데
여태 당신 속정까지는 닮지 못했다
―「데칼코마니」 전문
제목이 시사하는 것은 평소 멀게 느껴졌던 아버지의 복사판이 나라는 뜻. 닮고 싶지 않았지만 닮아만 가는 존재인 아버지. 노름판에 논밭뙈기 싹 날려버린 사람은 아버지 당신일 게다. 한 재산 날렸는데 자식이 공부를 잘하니 학비며 상급학교 진학이며 근심을 몰고 왔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먼 조화여 시방”이라는 애매한 말로 마음을 표현한다. 자식 자랑도 당신 타박으로 하신 아버지와는 평생 서먹서먹한 사이였던 것 같다. 화자는 “구들장 틈으로 새는 연기를 참으며/자는 척, 당신의 눈물을 본 것”인데, “꼭 탁한 아비가 된 나를 본 것”이라고 함은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를 판박이처럼 닮고 말았다는 것일 터, 그래서 제목이 ‘데칼코마니’가 되었나 보다.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아직 서슬 퍼런 지청구는 여전한데/여태 당신 속정까지는 닮지 못했다”는 것은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 표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시는 이 한 편이 전부다. 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분인가 본다. 어머니에 대한 시는 10편은 족히 된다. “세수 81년 피보호자 지채순”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일 터, 아직도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 35”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다.
우물가 앵두가 낯을 붉히면
아래 바탕 황새목 둔덕에선
밤꽃들이 한바탕 농을 치고 있었다
그때쯤, 하늬바람 일어서
청보리 알들 영글어 가는데
종다리는 보릿고개를 더 높이 울었다
다랑이 물꼬를 터 빗물을 잡던 날
덜 여문 겉보리로 끼니를 풀칠할 때
하지감자는 엄니의 한철 희망이었다
개울가 콩서리로 해찰만 부리는 자식들
부지깽이도 뛰어다니는 농번기에
당신 애옥살이는 감물처럼 깊어만 갔다
뻐꾸기 울어쌓는 유월, 팔순 엄니의
오래된 정원 같은 곳간이 택배로 왔다
지긋한 보자기에 핀 자주감자 향기며
속을 비워 꼿꼿한 노후 같은 대파,
알싸한 갓김치와 농익은 파김치의 저녁
두멧골 풍경 한 폭에 금세 살림이 환하다
―「오래된 정원」 전문
한여름 땡볕 아래서도 일을 하는 것은, 가을에 자식에게 농산물을 보내기 위해서다. 어머니가 택배로 부쳐주신 것으로 차린 식탁을 “두멧골 풍경 한 폭에 금세 살림이 환하다”고 표현했다. 어머니의 지극정성, 자식사랑, 희생정신……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어머니의 평생 애옥살이 덕에 자식의 식탁이 풍성해지는 이 현상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주고도 모자라 더 주고 싶은 팔순 노모의 마음에 대해 “곳간”을 통째로 받았다고나 해야 그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일궈낸 소출을 받아서 먹는 시인의 마음이 환하다.
알밤 몇 톨과 홍시로 허기를 채우며 땀을 훔치던 엄마
배고픈 절망이 배불러 올 때
긴 한숨으로 고추를 따던 엄마를 맥없이 불러보곤 했다
―「묵정밭이 있는 풍경」 부분
허옇게 밑동을 내보인 쌀독,
소쿠리에 꽁보리밥마저 말라붙은 날
고구마는 동치미 없이도 한 겨울 엄니의 희망이었다
토방엔 다섯 켤레의 고무신이
풀대죽 쑤는 냄새에 지쳐 연신 구시렁댔다
―「보릿고개」 부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말기와 전후에 보릿고개라는 절대빈곤을 겪었지만 60년대에도 사정은 나아지질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 국민이 기아선상에 허덕일 때, 다행히도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이런 희생이 없었다면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화자는 대도시에 와서 살게 되면서 문명의 혜택과 물질의 풍요로 살이 자꾸 찌는 것이었다. “치맛귀로 눈물을 훔치며/아궁이에 꾸역꾸역 지피던/어머니의 춘궁이 배달된 날” 화자는 “하필이면 과체중으로/고혈압, 당뇨를 판정받”기에 이른다. “무시래기, 청국장, 새앙,/산도라지 날로 보낸 뜻”(「어머니와 보릿고개의 실루엣」)은 이런 것을 먹어야 성인병도 예방되고 살도 안 찐다는 뜻일 터, 생활습관을 바꾸리라 결심을 해본다.
어머니의 희생은 정말 눈물겨웠다. “평생 40kg를 넘겨본 적 없는 생은/고샅길로 허기진 달빛의 손을 끌며/울먹이는 그림자마저 자식들에겐 감췄다”(「대둔산 사모곡」)는 시구를 보면 “한문 지식 몇 톨이 전 재산이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한평생 가혹한 노동의 나날을 보낸 분임을 알 수 있다. 가난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산 어떤 어머니는 남편을 앞세웠는데, 시는 이렇게 끝난다.
한 서린 백년 사랑을 필사조차 못하는데
시인의 그 어떤 사랑의 애달픈 비유가
어머니의 망부가보다 더 차가운 그리움일까
‘여보 사랑해요’
짧은 오열 한 문장이
적막한 산중의 눈물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어머니의 망부가」 부분
부부의 연은 사별을 예비한 것이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땅에 묻게 된다. 생명에 대한 회한과 세월의 힘이 가슴을 치는 시다. 시인은 「모란장 대폿집」에서 장삼이사들의 애환을 다루기도 하고 「만화반창 웃음꽃 피다」에서 친구였던 개그맨 김형곤을 추모하기도 한다. 생이란 결국 비애의 연속이고 인간의 마지막 길은 죽음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시인은 ‘신앙’을 선택한다. 대체로 종교는 인간을 허무주의자가 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섬광처럼 뇌리에 꽂히는
순간의 음성을 읽었다
땅에 엎드려 이틀 낮밤을
부질없던 생을 내려치며
바울처럼 너무 늦게 울었다
눈물 끝에서 마중한 길
마음의 뜰에 연초록이 돋고
기쁨이 먼저 내일로 피었다
오늘과 같아 일생을 살리라
강하고 담대하게 기뻐 살아
영혼을 적시는 말씀 나르는
새 에덴의 푸른 종이 되리라
너무 늦은 참회로도
나중 되는 생명나무가 되리라
세상의 헛된 것을 죄 버리고
A.D. 2014. 1. 20일 9시 20분
오늘 다시, 생의 처음을 산다
―「A.D. 첫날」 전문
“바울처럼 너무 늦게 울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시적 화자 혹은 시인 자신이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이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강하고 담대하게 기뻐 살아/영혼을 적시는 말씀 나르는/새 에덴의 푸른 종이 되리라”, “너무 늦은 참회로도/나중 되는 생명나무 되리라” 같은 구절로 보아 때늦은 깨달음이 더욱 깊은 신앙심의 길로 이끈 것이 아닌가, 여겨지게 한다. 신앙이란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의 사후는 어떻게 되는가. 무(無)인가 구원인가 윤회인가. “작고 하찮은 것조차 그 자리에 놓아/세상을 선물한 당신께 감사할 뿐이다”, “감읍한 말씀을 푯대로/겸사와 감사로 나중 된 자로 승리하리라”는 결구에 이르면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시인의 확신을 감지할 수 있다.
기억 저편,
또 다른 기억이 있을 법하다
천상의 그 어디쯤
내 졸필을 일갈하실 이소(耳笑)*
세상의 행간에
더는 저장할 공간이 없어
스승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마지막 유품을 정리한 오늘
날선 문자들이 항변을 한다
호흡이 너무 길다고,
시(詩) 정신만은 놓지 말라던
카랑한 가르침이 작달비로 내린다
회초리라도 진종일 맞아서
지천명이나마 제 뜻대로 읽어
행 갈음이라도 해야 될 텐데
나는 아직도 시, 너를 모른다
기억 저편에서 스승은
모사뿐인 이 내 시(詩)살이를
짐짓 못 본 척,
귀로 웃고 계신다
―「귀로 웃는 스승」 전문
그러고 보니, 김원식 시인은 귀로 웃는 스승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시인이었다. 임영조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김 시인을 본 것이 어언 12년 전 일이다. 고려대 평생교육원에서 만나 사제의 연을 가지며 시를 배웠는데 스승은 가고 제자는 남았다. 스승이 시란 이런 것이며 이렇게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는데 제자는 아직도 시를 모른다고 자책한다. 그래서 아래의 시를 쓴 것이리라.
만 천백 일흔둘의 문자로
못질도 없이 짓는
박꽃 뜬 초가 한 채
대저, 나의 시(詩)살이는
―「나의 生」 전문
하이데거가 말했던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문자로 못질도 없이 짓는 집 한 채가, 박꽃 뜬 초가 한 채가 되리라는 구절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꽃과 집(가족)과 연인을 위해 시를 썼던 시인이 이제는 시를 위해 나의 남은 생을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며 시집을 냄으로써 제3의 생을 살게 된 김원식 시인의 문운장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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