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 「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수런거리는 뒤란』서평: 농경 문화의 붕괴와 고아 의식의 징후
/ 조기조
문태준씨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은 자본의 축적을 지향하는 근대 이행과정의 소외된 농경 문화의 붕괴와 그 잔영을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유년 체험으로 깊이 각인되었을 농촌 마을의 쇠락한 모습을 죽음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수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집은 말하자면 붕괴된 농경 문화의 유언집인 셈이다.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처사줄을 감아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밴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 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 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서야 죽음 쪽으로 돌아눕는다
- [포도나무들] 부분
시인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농민시, 혹은 농촌시들이 농경적 문화를 이상화하려 한다거나 그 복원을 꿈꾸는 낭만적 경향을 드러내는데 문태준씨의 시들은 이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의 경향을 선대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소명감 깊은 장자(長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행된 현재적 지표를 두고 "나는 先代에 일어났던 몰락의 불기둥을 알지 못한다"라는 항변을 낳고 있는 후자의 경우를 '고아 의식'이라고 부름직하다.
이미 몰락이 완결된 선대적 삶의 유산을 자의든 타의든 이어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후세대의 한 의식으로서 말이다. 이 고아 의식이 어떤 시들을 낳는지 엿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문태준씨의 시에 투영된 고아 의식은 농경 문화와의 단절을 드러내고 있다. 그 공간은 단지 "주검을 조문하([겨울 꽃봉])"려 찾아가는 장소로 그려지고, 철새처럼 멈칫거려지는 "도래지([도래지에서 멈칫거리는 망명가들])"로 비유된다.
이 방문자적인 시선은 붕괴된 농경 문화와의 철저한 단절을 뜻한다. 자신의 삶의 근원적 뿌리는 그곳에서 비롯하였으되 "그러나 不歸, 不歸!([회고적인])"라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자아를 포용하는 농경적 세계의 원초적 친화성("귀살쩍은 나에게 추파를 던(지고) [새]", "저 맨발의 늙은네가 나를 꼬(셔도)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객체와의, 자아는 세계와의 조화나 통일보다는 갈등이 빚어지는 것도("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호두나무와의 사랑]", "녹슨 살대에 기름칠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 마음이 흉가에]") 고아 의식에서 비롯된 단절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하현달에 올라 낫을 갈며 나는 끊어지는 인연을([하짓날])" 보았던 것이다.
단절 의식과 더불어 드러나는 또 하나는 패배주의적 경향이다. 근대 이행의 강제는 그를, 폐경한 여인들과 빈집들과 황폐해진 농경지들로 이루어진 그 공간으로부터 그 공간 밖으로 내던졌다. 불가항력적인 이행에 제대로 맞설 수 없었던 그 공간은 이미 몰락을 눈앞에 둔, 전혀 후대의 성장을 도울 수 없는 "살아 있는 무덤"([하짓날])이었다.
무덤은 생존의 공간이 아니다. 농촌은 생존을 위해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불귀의 공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호두나무로 상징되는 그 공간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호두나무와의 사랑])"고 고백하고 있다. 그 무지막지한 경험은, 그 소외를 두고 "우리는 등을 켜고 가만히" 볼 뿐,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는 꽃])다고 말하고 있듯 패배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언덕길에 곱사등이들이 모가지를 빼고 앉아 있네
문득 휘몰아친다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은
등뼈를 바깥으로 탈골시키네 그들은 대갈못처럼
더욱 주저앉네, 꽃에서 한 잎의 귀가 떨어지네
이 지상에서 잊혀진 소리들이 건너 지방으로……
우리는 등을 켜고 가만히 보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을.
- [지는 꽃] 전문
한편 그 고아 의식은 혼란스러운 분열의 양상도 함께 가지고 있다. "흉악범 같은 아버지들의 딱딱한 혀도 한됫박 모여 있다([곳간])"와 같이 선대적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가 하면, [한 주정꾼의 이야기] 같이 애잔한 연민을 내비치고도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존재론적 자아에 대해서도 애증의 교차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 고아 의식이 어떠한 방법적 구현을 이루어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문태준씨는 농경 문화의 몰락과 그 잔영을 서사적 방법과 함께 이미지의 강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서사적 방법의 지향은 현대시가 서정만으로는 주체할 수 없게된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한 전략으로서 근대 이행기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계몽주의와 만나 핍진한 현실의 재현을 통해 이행의 고삐를 쥐기도 하고 박차를 가하기도 하면서 수립된 한국 현대시사의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문태준씨의 시들에서는 전통적 서사적 방법의 온전한 계승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많은 부분 이미지를 혼재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전자가 현실에 대한 응전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면, 문태준씨의 경우는 이미 붕괴된 농경 문화의 기억과 회고 자체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몰락한 세계에서 구체적인 실물의 살풍경한 삶의 재구성은 불가능한 까닭에 몰락한 삶의 재현은 오직 이미지의 구축으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점은, 생생한 삶이 역동적으로 드러난 [白露], [下里 정미소], [오, 나의 어머니], [열락의 꽃], [焚書] 등과 같은 시들이 있는가 하면, 올빼미, 까마귀, 수탉(투계), 고양이, 나비(나방), 쥐, 소(암소), 뱀, 능구렁이 등 모두 죽음과 관련된 상징의 채용을 통한 시적 구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서사와 이미지의 혼재는, 방법적 차원에서 볼 때, 합일보다 오히려 분열 양상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삶의 파노라마를, 서사의 확장이 이루어져야할 지점에서 영정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대체되면서 한껏 위축시키고 있다. 의지할 곳이 만만치 않은 고아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불안은 그 지향점을 분명히 하는 데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행은 농경 문화의 붕괴를 완성하였다. 이행 과정의 세계의 부분적 붕괴는 비록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과정의 억압적 체제 속의 의식 구조는 고아 의식이라는 병적 징후를 낳게 하고 있다. ▣ 출전 : 『시평』, 2000, 가을
기억과 현실, 그 '사이'에 대한 성찰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4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낸 시인 문태준의 『맨발』은 ‘기억의 터’에 바쳐진 시집이다. 일산에서 살면서 10년째 불교방송의 프로듀서로서 일하고 있는 시인을 만나 “어두워지는 순간”에 경사된 내면의 결과 그 뿌리를 훔쳐보았다. 유년 시절 ‘상징적 죽음’이란 제의 행위를 치러야 했던 시인의 내력에서 죽음의 문을 엿본 자는 천상 시인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태준의 시적 상상력은 ‘기억’이다. 첫시집 『수런거리는 뒤란』(2000) 이후 4년 만에 펴낸 시집 『맨발』(창비, 2004)에는 시인 특유의 기억의 시학이 시집 전편에 묻어난다. 문태준의 시는 왜 시라는 장르가 ‘기억의 터(lieux)’에 바쳐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의 터’는 딱히 구체적 장소를 뜻하지는 않지만, 유년과 성장기를 보냈던 고향 김천의 자연과 아무래도 깊은 친연성을 맺는다.
예컨대 3연 4행으로 이루어진 「그림자와 나무」라는 시를 보면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갈참나무의 그림자들이 비탈로 쏟아지고 있다 / 저 검고 지루한 주름들은 나무 속에서 흘러나왔다 // 내 몸속에서 겨울 문틈에 흔들리던 호롱불이 흘러나오고, 깻잎처럼 몸을 포개고 울던 누이가 흘러나오고, 한켠이 캄캄하게 비어 있던 들마루가 흘러나오고…… // 오후 4시는 그래서 나에게 아주 슬픈 시간이다.”
이 시에서 이미지의 작용을 보려면 동사動詞의 활용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흘러나오고”라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동사의 적절한 활용은 기억의 원천으로서 문태준의 존재를 부상시키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60편 남짓한 시집 『맨발』에서 이러한 기억의 시학이 가장 풍성한 이미지로 표현된 작품이 아마도 「어두워지는 순간」과 「한 호흡」일 듯하다. 시인은 “오후 4시”(「그림자와 나무」) 또는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라는 사례처럼, “어두워지는 순간”에 심리적으로 깊이 경사되어 있다. 이 시의 경우 “순간”처럼 삽시간에 씌어졌다.
서정시치고는 주선율이 꽤 긴 호흡과 가락으로 짜여진 「어두워지는 순간」을 이루는 세계는 충만한 생명이 생성生成되는 기억과 상징의 공간이다.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이라는 시의 표현은 ‘생명은 평등하다’라는 생명사상을 형상화한 문학적 사례라고 볼 수 있으리라.
『맨발』에 나타난 존재미학과 생성의 시학 시인은 “어두워지는 순간”에 생성되는 평등한 생명의 질서 앞에서 문자로 기록할 수 없음을 토로한다.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라는 시인의 표현은 ‘사이[間]’의 생성에 대한 근원적 헌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 시를 비롯한 문태준의 시적 지향점은 존재미학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사람만이 우월한 존재인가?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고 봅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어떤 과정에 대한 사유를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뭐랄까, 그런 과정에서 식물적 상상력이 많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존재론적 사유에 끌리고 시작 방법론으로써 존재미학의 한 경지를 열고자 하는 문태준의 시쓰기에는 ‘상징적 죽음’이란 제의 행위를 치러야 했던 유년의 기억들이 있다. 문태준은 지금껏 유년 시절에 겪어야 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간직하고 있다.
사연인즉, 유년 시절에 시인이 ‘열병’을 심하게 앓았는데, 무당의 전언에 의하면 나무꾼이었던 아버지가 산신이 든 나무를 잘못 베어내서 그랬다는 것이다. 무당의 굿이 시작되고, 시인의 아버지는 무당의 명命에 따라 어린 문태준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마루에 내려놓고 그 위에 삽으로 흙을 퍼부었다. 아버지에 의한 상징적인 ‘자식 살해’가 진행된 셈이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 문태준의 열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 사건 탓이었을까. 두 번의 생을 사는 자는 이미 한 차례 엿본 삶의 비밀 때문에 천상 시인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시인이 펴낸 두 권의 시집에 유독 ‘소멸’에 대한 시인의 집착이 전경화된 점은 그래서 이해가 될 수 있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서는 일종의 ‘빈집’의 수사학이 자주 나타났다.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한 시집 속 사물들의 풍경은 1930년대 백석白石과 1970년대 신경림의 농촌시와는 ‘새로운 낡음’의 경지를 펼쳐 보인다.
가령 고향 땅을 지키고 있는 호두나무를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호두나무와의 사랑」)라고 상징화한 사례는 단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시인의 문우 박형준 시인은 “서사의 시각화가 도드라지는 것은 그가 고향에 대한 추억을 현재화해 살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있는 고향에 자신을 투신해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 「맨발」은 <시인·평론가가 선정한 2003년 최고의 시>로 뽑힌 바 있다. 이 시는 두 겹의 이야기가 겹쳐져 있다. 개조개의 “부르튼 맨발”과 함께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의 고단했던 행적을 맨발로 표상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감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전문>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로 나섰다가 /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강조 인용자)이라는 표현처럼 문태준 시인의 시집에서 적재적소의 형용사의 사용은 시를 읽는 맛을 더해준다.
“불가에 곽시쌍부槨示雙趺란 말이 있는데, 부처가 죽었을 때 관 밖으로 내민 맨발을 보인 데서 유래합니다. 이 시는 오래 길을 걸어간 사람에 대한 시라고 볼 수 있지요. 나뭇짐을 지고 산길 30리를 걸어 김천장을 오갔던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어요.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백석, 미당, 김종삼 등 시공부 …‘요즘의 나’에 대해 쓸 것 그는 문청 시절 고은, 신경림, 고재종 등 농촌시를 읽었다. 선배 세대와 문태준 시인의 시쓰기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이 샤머니즘과 불교의 영성靈性을 접했다는 점일 것이다.
“요즘에는 백석, 미당, 김종삼의 시를 공부하고 있어요. 김종삼의 경우 행간의 여백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볼 측면이 있다고 봐요. 첫 시집의 세계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란 천천히 엷어지는 것이라고 봐요. 시집을 내고 나서는 ‘요즘의 나’에 대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인은 요즘 “시가 흘러나온다”고 말한다. 올 가을에만 벌써 12편의 시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일산에 사는 시인은 서울 마포의 불교방송사에서 10년째 프로듀서로서 일하고 있다. 아침 9시 프로그램 <차 한 잔의 선율>을 맡아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시인의 「햇차를 끓이다가」라는 작품은 사물의 내력을 오랫동안 응시한 자의 어떤 깨달음이 느껴진다.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이 “차나무의 햇잎들”로 피어나는 순간을 포착한 이 시의 화자는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라고 말한다. 일종의 선문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시계 초침은 “오후 4시”를 가리킨다. “오후 4시는 그래서 나에게 아주 슬픈 시간이다”(「그림자와 나무」)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시간을 앗아가서는 안 될 것이리라.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시 「한 호흡」 전문
(기전 문화예술 웹진) 고영직/본지기자 문학평론가 사진/이현석
올해의 좋은 시
1953년 영국에서 시인 T S 엘리엇 등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시집(詩集) 사랑 모임’이 독자들을 상대로 ‘좋아하는 시인’을 뽑았다. 누구나 결과가 뻔할 것이라 믿었다. ‘황무지’를 쓴 노벨상 수상 작가 T S 엘리엇은 어떤 조사를 하든 부동의 1위 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엘리엇은 W H 오든의 아랫자리인 7위에 머물렀다. 조사가 이루어질 즈음에는 좋은 시들을 발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도 ‘좋은 시’ 또는 ‘좋아하는 시인’을 선정하기 위한 조사가 문학잡지들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문학잡지들이 고정독자를 확보하지 못해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이런 조사는 그나마 매스컴의 관심을 끌어 독자들에게 잡지의 존재를 알리는 방편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언제, 누구를 대상으로 조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2002년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가 창간하면서 시인과 평론가들을 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조사했다. 1위 김소월, 2위 서정주, 3위 정지용으로 나타났다. 2년 뒤 같은 잡지가 평론가 빼고 시인들만을 상대로 똑같은 조사를 했다. 이번에는 1위 서정주, 2위 백석, 3위 김수영이었다. 일반인들을 대상을 한 조사들에서는 ‘서시’의 윤동주가 1위를 놓치지 않는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시인 문태준이 작년 ‘맨발’에 이어 올해도 시 ‘가재미’로 시인과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를 쓴 시인으로 뽑혔다. 말기 암으로 고향 병상에 누워 있는 큰어머니를 병문안하고, 그녀와 함께했던 삶의 기억들을 따뜻한 언어로 떠올린 시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어느 평론가가 “그의 시를 읽으면 흙먼지 뒤집어쓴 시골 찻길이 생각난다”고 말한 것처럼, 문태준의 시는 삶과 자연에 대한 통찰을 쉽고 편하게 전한다.
▶남들은 한번도 어려운 영예를 2년 연거푸 차지한 데 박수를 보낸다. 지나간 명성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시작(詩作)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 더 뜻깊다. 본인은 다만 “요즘에야 시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이고, 죄없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인은 죄많은 중생들에겐 그 존재 자체가 구원이다.
쏜살같이 내려와 토끼를 채가는 새매처럼 시는
일순에 쏟아져야 한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확확 터져나오는 전율처럼 올 때를 나는 기다린다
그게 잘 안되어서 밤 늦도록 전전긍긍하는 때가 많다
큰 재주가 없다는 것일게다
삶과 시의 터전이 영 시원챦다는 것일게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고만 고만하다는 것일게다
큰 재주가 없으면 오래 오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나는 또 송수하다
대체로 나는 사상이나 모랄같은 것이 전면에 드러나는것이
좋기만 한 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자처럼 거느리는 배경이 있는 시를 좋아하는게
내 시의 취향인가보다
<현대시학 중에서>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고샅을 돌아 부푼 달 아래 걷는데
거뭇거뭇한 논배미에서
한 뭉테기로 와글,
귀를 촘촘하게 열었더니
논개구리들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이 봄밤에 방랑악사들이
대고를 두드리는데
참 멋진 춘화 한장입니다
온 우주가 잔뜩 바람난 꽃입니다
나무 다리 위에서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짧은 낮잠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흰자두꽃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하번 굵은 손벼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모닥불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회고적인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창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가 움직이면 모두 詩가 되었다 (0) | 2006.04.01 |
---|---|
[스크랩] 詩人김용택 (0) | 2006.04.01 |
[스크랩] 문장 만들기 십계명 (0) | 2006.04.01 |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 (0) | 2006.04.01 |
시인들에게 드리는 고언 / 독자 (0) | 200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