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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의 32 : 첫 행은 시의 구조와 성패까지 결정함을 알아 두자

시인답게 2006. 10. 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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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32

 

 

첫 행은 시의 구조와 성패까지 결정함을 알아 두자

 

 

 

 

 

시를 쓸 때 시작하는 첫 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첫 행이 좋으면 시의 절반은 성공이다. 이 말은 반대로 첫 행의 실패는 절반의 실패가 된다. 시가 절반이나 실패했으면 그것은 결국 시 창작 전체의 실패로 귀결한다. 첫 행은 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미터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 입시에서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어 많은 수험생들이 곤혹을 치렀는데, 특히 1교시의 언어 영역이 어려워서 더 많은 학생들이 수능 자체를 포기하는 사태가 유발되었다. 1교시 시험 결과에 절망하니까, 나머지 시험을 아예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나 수능 시험은 비록 1교시 시험을 잘못 치러도 나머지 시험을 정신을 차리고 잘 치르면 만회할 수도 있다.

시 창작의 경우는 첫 행이 제대로 출발하지 못하면, 나머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생명체가 신경 세포나 혈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듯이 시도 유기체로서의 행과 행, 연과 연, 낱말과 낱말 등이 서로 어우러져서 상호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한다. 시는 산문에 비해 더욱 다층적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시의 첫 행이 부실하면 어떻게 나머지 행들이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시의 관계망은 상상력의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상상력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 행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대부분 시의 첫 행은 맨 처음 착상된 이미지이거나 시의 중심 의미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유치환의 시 중에서 많이 알려진 시들을 보면, 거의가 첫 행이 맨 처음 착상된 이미지이거나 시의 중심 의미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이 시의 중심 의미다. 따라서 ‘사랑하는 것은’은 이 시의 첫 행으로서 시의 탯줄이다. 이 시의 시상은 ‘사랑하는 것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기 때문에 화자는 자연스럽게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라고 시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 시의 첫 행이 시상의 뿌리이고 탯줄임이 확인된다. 유치환의 <깃발>도 보면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첫 행이 <깃발>의 기반이 되는 중심 이미지다. ‘아우성’이 ’손수건’을 낳고 또한 ‘손수건’은 또 다른 이미지를 계속 생산해 낸다.

시의 중심이 첫 행에 놓이는 것은 시작의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을 상기해도 좋다.


꽃으로 다가간다

꽃을 본다

꽃과 나는 마주선다

숨어있던 꽃의 가시가 일어서더니

나의 급소를 향하여

깊숙이 찔러온다

내 정맥 속에 숨어서 흐르지 않던 피들이

안개처럼 피어 오르더니만

독기로 발효되어

서서히 취하게 한다

마주서서

가슴으로 서로를 지우다가, 지우다가,

마침내 나만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단 한 번의 순간

그대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이 된다.

-구석본, <>


이 시의 첫 행은 시의 제목으로 시작한다. 제목은 시의 얼굴이고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시도 첫 행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의 첫 행이 꼭 중심 의미나 이미지 혹은 제목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중심부보다는 주변부로 시작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목욕을 할 때 바로 심장부를 씻는 것이 아니라 손끝이나 발끝부터 물을 적시면서 몸을 씻어야지, 처음부터 중심부를 급작스럽게 건드리면 간혹 드물게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시상의 전개도 처음부터 중심부를 건드리는 것만은 능사만은 아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함께 용두 사미라는 말도 역시 유념해야 한다.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머․니 

-김종해, <사모곡>


이 시의 중심 이미지는 어머니다. 그 어머니는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중심부는 2연이나 3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의 첫 행은 변죽을 울리면서 시작한다. <사모곡>처럼 중심을 뒤에다 두고 첫 행은 가볍게 시작해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서술시에서는 사건의 시작을 첫 행으로 삼거나, 계절을 다루는 시에서는 봄을 첫 행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적 질서대로 꼭 시적 출발이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역전이나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의 첫 행은 중심 의미나 이미지로 시작하면 무난한 편이나 때로는 시의 변방 지대부터 서서히 중심부로 이행할 수도 있다. 시의 첫 행이 주변부로 가볍게 시작하면, 의미 중심이 중간이나 끝에 오게 되니까 시의 무게의 추는 중․후반부로 기울면서 점층적 구조가 될 것이다. 시의 첫 행이 중심부로 시작하든 주변부로 시작하든 시의 구조를 결정함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시의 성패까지 좌우한다는 것을 명심해 둘 일이다.


출처 : 디카시 마니아
글쓴이 : 이상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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