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스크랩] 공동묘지 가보셨어요?

시인답게 2006. 12. 3. 13:16

 

집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가끔 가서 어슬렁거린다. 밝고 화사한 공원보다 적막하고 쓸쓸한 묘지가 더 마음에 든다. 공동묘지에 대한 편견이 많다. 의외로 운치 만점이다. 햇살이 따뜻하면 그보다 더 아늑한 곳이 없다. 노을은 세상에서 제일 애틋하게 물들고 달빛은 갈비뼈까지 스며든다. 여기에 소쩍새나 솔부엉이 우는 소리까지 곁들여지면 몸이 분해된다. 수준낮은 귀신들의 텃세가 흠이라면 흠이랄까. 암튼 주야간 데이트코스로 강추!

 


공동묘지의 아취가 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다. 특히 납골당이 문제다. 훈련소 관물함 같은 꼴까지는 봐준다. 이름 석자에 매몰스런 생몰연대만 달랑. 이승과 저승의 인터페이스가 너무 몰염치하다. 봐도 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이름 밑에 경전 한 줄, 시 한 도막이라도 새겨넣게 묘비 포맷이라도좀 바꾸지. 묘비 표정이 한결 달라지고 우리같이 할일없는 배회꾼도 한결 신이 날 턴듸.

 

 

 

 

 거창한 것 말고, 망자의 인생을 요약한 한줄짜리 “평전” 같은 것 넣는 수도 있다. 자작이면 더 둏고. 이를테면,

 

박주옥 1965-1997

“구절초처럼 피어났던 여인입니다.”

 

망자가 생전에 자주 입에 담던 말 한마디를 붙여도 될 거다.
 
이갑돌 1935-2006

“밥은 묵고 댕기는겨라?”

 

목동마님 1957-2070

“꼬라지하고는.........”

(목동마님 요즘 머 하시나?)


하긴 이름 석자 생몰연대만이라도 나름대로 감흥은 있다. 험한 시대만 골라서 살다간 가엾은 노인네들, 열몇살 스물몇살 살고 죽은 성급한 친구들, 처녀들, 총각들, 언젠가 어디선가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를 딱한 동갑내기들. 울며 죽은 사람들, 기다리다 죽은 사람들,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은 사람들,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흔한 이름, 흔한 연대들이 더듬더듬 말을 걸어온다.


가끔 이상한(?) 묘비들도 있다. 몇칠 전 야외 납골 지역에서 본 합장묘가 안 잊힌다.

 

오** (남), 윤** (여)

1925.3.3-2006.9.3
1827.5.7-1926.7.4

 

합장이란 비범한 인연들을 위한 공사인듸, 이 묘비의 인연은 당최 짐작도 안된다. 여자는 십구 세기 초부터 이십 세기일제시대 초까지 백년 가까이 살았다. 남자는 여자가 타계하기 전 해에 나서 올 구월에 죽었다. 이승에서 겹치는 세월이 일년 남짓. 모자 사이는 불가능하다. 할머니와 손주 사이라 우기기도 어렵다. 이승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안방마님과 마당쇠일 리도 없다. 증조할머니와 손자 사이일까? 행정 착오일까?

 

그날은 납골당을 노닐다가 묘비앞에 붙은 생자들의 쪽지를 둘이나 봤다. 워낙 뭐 붙여놓는 걸 엄금하는 곳이라서, 가물에 콩나듯 어쩌다 한번 마주치는 일은 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방금전에 붙여놓은 것이거나 환경미화원이 조퇴라도 했던 모양이다. 노란 포스트잇은 천구백오십사 년에 나서 올해 구월에 죽은 남자의 묘였는듸, 여자 특유의 예쁘고 깔끔한 글씨였다.

 

XX 아빠 그동안 자알 지냈구 있었어?
당신이 너무 보고 시퍼. 힘들다. 견디기가.
하늘에서 우리 XX, XX 자알 지켜보구 있지?
그곳에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있어.
또 올께.

 

납골당에 가면 흔히 만나는 넋두리지만 역시 가슴이 저렸다. 들꽃이 흔해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과 같은 이치일까. 별과 꽃과 바람과 새소리와 교묘한 싯구가 모두 알 수 없는 길로 알 수 없는 신비와 내통하는 것들이지만, 사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만큼 불가해한 신비도 없는 것같다. 이 그리움이라는 쪽배 하나 있으면 사람들은 철학이나 종교의 보증 없이도 이승밖의 어둠 속으로 감연히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않던가. 그렇다면 세상과 사후에 대한 설명 찾아다니느라 헛수고하느니 아예 육신 안에다 이 그리움의 샘을 깊이 깊이 파는 것이 더 실속있는 장사가 아닐까.

 

거기서 한 오미터쯤 떨어진 곳에 붙어 있는 파란 포스트잇 앞에서는 천천히 담배 한대를 다 피웠다. 파란 포스트잇에는 글씨가 한 자도 없었다. 글씨 대신 츠자의 빨갛고 도톰한, 육감적인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른한살에 죽은 사내의 납골함이었다.

 

  

 

 

 

by  땡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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