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가끔 가서 어슬렁거린다. 밝고 화사한 공원보다 적막하고 쓸쓸한 묘지가 더 마음에 든다. 공동묘지에 대한 편견이 많다. 의외로 운치 만점이다. 햇살이 따뜻하면 그보다 더 아늑한 곳이 없다. 노을은 세상에서 제일 애틋하게 물들고 달빛은 갈비뼈까지 스며든다. 여기에 소쩍새나 솔부엉이 우는 소리까지 곁들여지면 몸이 분해된다. 수준낮은 귀신들의 텃세가 흠이라면 흠이랄까. 암튼 주야간 데이트코스로 강추!
거창한 것 말고, 망자의 인생을 요약한 한줄짜리 “평전” 같은 것 넣는 수도 있다. 자작이면 더 둏고. 이를테면,
박주옥 1965-1997 “구절초처럼 피어났던 여인입니다.”
망자가 생전에 자주 입에 담던 말 한마디를 붙여도 될 거다. “밥은 묵고 댕기는겨라?”
목동마님 1957-2070 “꼬라지하고는.........” (목동마님 요즘 머 하시나?)
오** (남), 윤** (여) 1925.3.3-2006.9.3
합장이란 비범한 인연들을 위한 공사인듸, 이 묘비의 인연은 당최 짐작도 안된다. 여자는 십구 세기 초부터 이십 세기일제시대 초까지 백년 가까이 살았다. 남자는 여자가 타계하기 전 해에 나서 올 구월에 죽었다. 이승에서 겹치는 세월이 일년 남짓. 모자 사이는 불가능하다. 할머니와 손주 사이라 우기기도 어렵다. 이승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안방마님과 마당쇠일 리도 없다. 증조할머니와 손자 사이일까? 행정 착오일까?
그날은 납골당을 노닐다가 묘비앞에 붙은 생자들의 쪽지를 둘이나 봤다. 워낙 뭐 붙여놓는 걸 엄금하는 곳이라서, 가물에 콩나듯 어쩌다 한번 마주치는 일은 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방금전에 붙여놓은 것이거나 환경미화원이 조퇴라도 했던 모양이다. 노란 포스트잇은 천구백오십사 년에 나서 올해 구월에 죽은 남자의 묘였는듸, 여자 특유의 예쁘고 깔끔한 글씨였다.
XX 아빠 그동안 자알 지냈구 있었어?
납골당에 가면 흔히 만나는 넋두리지만 역시 가슴이 저렸다. 들꽃이 흔해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과 같은 이치일까. 별과 꽃과 바람과 새소리와 교묘한 싯구가 모두 알 수 없는 길로 알 수 없는 신비와 내통하는 것들이지만, 사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만큼 불가해한 신비도 없는 것같다. 이 그리움이라는 쪽배 하나 있으면 사람들은 철학이나 종교의 보증 없이도 이승밖의 어둠 속으로 감연히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않던가. 그렇다면 세상과 사후에 대한 설명 찾아다니느라 헛수고하느니 아예 육신 안에다 이 그리움의 샘을 깊이 깊이 파는 것이 더 실속있는 장사가 아닐까.
거기서 한 오미터쯤 떨어진 곳에 붙어 있는 파란 포스트잇 앞에서는 천천히 담배 한대를 다 피웠다. 파란 포스트잇에는 글씨가 한 자도 없었다. 글씨 대신 츠자의 빨갛고 도톰한, 육감적인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른한살에 죽은 사내의 납골함이었다.
by 땡순이
* <무브온21블로거기자단>이란 : 무브온21에서 활동하는 논객들이 모여 구성한 기자단입니다. 무브온21의 주요 칼럼과 무브온21 논객들이 기획한 기사와 인터뷰를 내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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