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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隨筆) l 피천득

시인답게 2007. 6. 7. 20:29

수필(隨筆)

 

 

수필(隨筆)은 청자 연적(靑瓷硯適)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街路樹) 늘어진 포도(鋪道)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住宅街)에 있다.

 

수필은 청춘(靑春)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中年)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情熱)이나 심오(深奧)한 지성(知性)을 내포(內包)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隨筆家)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餘韻)이 숨어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恍惚燦爛)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退落)하여 추(醜)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읽는 사람 얼굴에 미소(微笑)를 띄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懶怠)하지 아니하고,

속박(束縛)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燦爛)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生活經驗), 자연 관찰(自然觀察), 인간성(人間性)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個性)과

그 때의 심정(心情)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筆者)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芳香)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과 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소설가나 극작가(劇作家)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性格)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率直)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親密感)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德壽宮) 박물관(博物館)에 청자 연적(靑瓷硯適)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잇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焦燥)와 번잡(煩雜)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글: 피천득, 출처 : 피천득 수필집 '인연(因緣)'
출처 : 굴뚝새 시인
글쓴이 : 심은섭<굴뚝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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