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 눈섶에 들다
어느덧, 한해를 마중한지도 꽤 많은 날들과 이별을 한 것 같다
그 상념이 된 도심의 공허 속에 갑자기 신의 축복이 그려진다.
제 길만을 명명하며 나와는 무관하게 뒷모습만 보여 주는 세월.
그 세월위로 눈이 내린다. 서럽게 흰 눈이 지상의 나를 유혹한다
그 쓸쓸한 그리움을 다독이려는 것일까?
그리움에 절이고 절인 하늘의 마음을 지상에 감추는 미소 같은 눈이
하얗게 울컥 이며 비껴 내린다
변이 없는 일상의 상실감속에 왜 자꾸만 그리움에 서럽대는 것일까
외로움의 무관심에 잦아드는 일몰의 쓸쓸함을 배경으로
바람의 알갱이도 되지 못한 채 깊은 상념의 노예가 되어 눈을 맞는다
죽음보다 더 깊은 불멸의 사랑을 앉혀 놓고 바람의 손님이 된 여인.
이미 납골이 된 지독하게 그리운 내 젊은 날의 혈흔이 된 이름.
내 사랑의 영혼으로 기꺼이 안고 살아야할 그때 그 사람.
못 다한 사랑의 마지막 숨결을 추억한다
추억의 마름질은 불가능 한 것일까?
시객 십 수년 생활 속에서도 덜어내지 못한 내 사랑의 울컥임 속에
나는 또 세상의 바깥으로 길을 잡는다
되돌아보면 사랑의 대가로 더 깊은 아픔을 잉태한 채 견뎌왔는지도 모를,
추억의 상흔이 무슨 의미랴만 지나간 사랑의 옹이들이 늘 나를 유혹한다
내 마음의 발길을 자꾸만 끌고 가서 그때의 기억 속에 날 가두어 놓고서는
하루를 그리움으로 확 불질러 놓은 채 매양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곤 한다
내 그리움의 파장은 어디인가?
내 추억 속 서슬 퍼런 이별과의 악수는 언제쯤일까?
오늘이 된 내일이 와도 나는 그리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로 차라리
겨울 산, 마른 그리움의 산에 오른다.
이렇게 겨울나무 나무마다 흰 눈꽃이 피어 온 세상 사랑의 눈물을
덮어 주는 날, 친구와 함께 겨울 산 눈의 나라로 길을 잡는다
한때, 단 한마디의 부탁에 친구의 전부였던, 일생이었던 모두를 선뜻
내주던 친구, 어디 사십억 이란 돈을 무조건 던져 줄 친구가 있겠는가?
친구는 내게 사십억 이란 돈을 나 하나의 이름과 우정 앞에 기꺼이 주었다
일본 유학 시절 학비를 마련하느라 앉아서 인스턴트 식사조차 제대로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는 그 친구는 어쩜 내 사랑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성공한 기업의 최고 경영자로, 나보다도 시를 더 사랑하는 친구.
친구는 내게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 것이다
어쨌거나, 첫 사랑 같은 눈이 오는 날, 조팝꽃 같은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말하지 앉아도 우린 산을 찾는다
청계산 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눈꽃 속으로 드는 길,
우릴 반기듯 토닥이듯 더욱 큰 눈을 내려 주는 신의 뜻을 헤아릴 길 없지만
햇살에 투영되는 순백의 손결 같은 눈의 중심으로 친구와 나는 길을 낸다
행여 속삭이는 소리에도 솔가지위에 간신이 앉아 쉬는 눈송이 무너질세라
친구와 난 바람을 막아주며 설원의 무릉도원 속으로 침묵의 발길을 옮긴다
계곡의 얼음장 밑을 흐르던 물길도 일어서서 고개를 내민 채 쫄쫄거리며
그립다 투정이고, 소나무 사이를 활공하는 산새들도 행여 눈꽃이 질세라
날개를 접고 날아든다
이수봉 언저리에서 마음을 들어 바라보는 설무 속에서
우린 더는 꼼짝할 수 없는 한 그루 겨울나무가 된다. 기다림의 표상이 된다
하늘의 외로움도 서럽서럽 커져서는 자꾸만 굵게 내리는 눈송이 속에
눈물을 감추고 잔뜩 흐려 제 모습을 감추고 어깨를 들썩인다
한다고 겨울 청계산이 하늘의 얼굴을 못 보겠냐마는 포근한 눈 이불 속에서
졸린 듯 애써 눈을 감아준다
세상의 외로움이나 쓸쓸함 그리고 가난한 통고쯤은 이 청계 설원의
축제 속에서 더 이상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다
다만 은자의 은유처럼 그저 겨울 눈꽃 축제 속에 용해되어 또 한 폭의
수묵화로, 겨울 그 발가벗은 나신의 아름다움으로 누워 버린다
나도 친구도 이미 청계 자락의 작은 침묵으로 소소소 이는 바람 되어
눈 꽃가루 속을 동화되어 나부낄 뿐 더는 속가의 연을 생각 짓지 않는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순결의 메시지가 내리는 날
나는 청계산 이수봉에서 덤으로 얻은 목숨 하나를 걸망에 담아
매바위 날개위에 걸터앉아 흐린 기억 속에 나의 길을 더듬어 보다가 끝내
세상 속으로 되오 는 길을 잃곤 한다
아직 하늘의 음성을 다 듣지 못해 매봉 굽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산화하는
낙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만, 청계산이 되어 주저앉기도 한다
그런 날엔 나는 더없이 행복하여 견딜 수없는 그리움으로 읊조려 본다
' 차암 좋은 친구'
제비꽃을 보아도 봄은 가고 제비꽃을 보지 못해도 봄은 간다지만 제비꽃은
자기를 보는 사람 앞에서만 핀다 했던가
시를 읽어도 살고 읽지 않아도 살수 있다지만 시를 읽지 않고 사는 사람은
적어도 시를 읽고 사는 사람보다는 불행하다 했던가
세상의 모든 추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 이 청계산 설원 속에, 이 침묵의
신비스런 풍광 속에 다 녹아 스며서 다시 아침 햇살처럼 말갛게 올려져서는
청정청정 해져서는, 자연의 그늘이래도 되어 살아졌음 한다
하산 길,
높이 오를수록 내려 올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함박눈 굵게 내려친다
내려 올 때 깨끗하게 흔적 없이 내려 와야 한다고 지나온 길을 지우며
따라오는 함박눈의 배웅을 받으며 친구와 나는 그냥 마주보며 씩 웃는다
오늘처럼 마음이 뜨건 날엔
이 길 끝자락, 맘 깊은 청계산 잉꼬부부의 선술집 웃음소리도 함박꽃처럼
피어 오를 것이다
단 한명이어도 좋을 친구와 청계산을 안고 내려 온 날, 이런 날엔
내 외로움의 그림자도 한 숨배 막걸리를 걸치고서 끝내는 노랫가락
한 곡조에 발그스레 취기가 올라 눈 덮인 청계 자락에 어둠으로 깃들 것이다
그 어둠 속에 수런대는 별들의 사랑놀이에 불을 끄고 스슬쩍 자릴 내어줄
아직 이름도 모르는 청계산 객주 부부의 파장도 더없이 조심스러울 것이다
오늘 같은 날, 눈섶에 들어 되게 한번 바람나고 잡다 .
친구와 함께라면 더 좋을, 단 한번의 고혹한 눈길에 오지게 바람나고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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