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방

10년 만에 휴스턴에서 날라온 기적

시인답게 2006. 3. 26. 09:54

10년 만에 휴스턴에서 날라온 기적



또 한해를 마중해야 할 쓸쓸한 12월의 끝자락이다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연유로 잊고 살아 가기도 하고,

혹은 삶의 현실에 치여 잊고 지나쳐 온 것들이 지천에 가득한것 같다

소중한것들을 때론 가슴속에서 삭여야 했던 문자같은 삶의 순간들이

내 생의 뒷편에 옹이처럼 남아 진한 추억의 회상으로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추억으로 가는 마차에 자의든 타의든 동승한 동반자의

운명으로 한생을 아우르며 살아가는지도 모를일이다

보내며 기다리며 그리워하며 아파하고 마음 적신 순간들이 인제는

내 생의 관솔처럼 단단해져서는 무뎌지고 무관심해지고 더는,

귀찮기까지도 한, 맛을 잃은 즈음의 이 몹쓸 그리움이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추억하며 눈물 짓는다. 그래서 시로서 살아가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12월을 마시며 마른 추억을 안주 삼아 계절의 끝을 방황하던 어느 날

지난밤 술자리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 울리는 휴대폰의 요란한 소리에

눈을 들었다

살다 보면 우리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있듯,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기적의 음성이었다

대학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이땅의 민주화며 사회 현상에 예민하게

반역하며 살아가던 시절, 친형보다도 더 따르며 술잔을 기울이던 이름,

최동옥 !!!

휴스턴에서 '코리안 저널'이란 신문사를 경영 한다며 이미 10년전

생이별을 뒤로 한채 이민을 갔다던 형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난 이미

화석이 되어있었다

긴 시간의 통화속에 흑백 필름처럼 상영되는 내 청춘의 파노라마속을

울먹였다

'차암 보고 싶었던, 아니 질곡 많은 삶의 터널에서 많이도 되뇌였던 이름 !

동옥 형'

많은 통화속에 난 이미 옛날 오장동 골목의 골동품이 되어 형과의 청춘을

더듬고 있었다

난 운명론자는 아니다

결코 참회의 기도는 드렸으나 구원의 기도는 올린적 없는 나로서는

운명보다는 땀의 참값을 현실화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나는 기적이라는걸

믿으려 한다

기적의 내용은 이렇다

조병화님의 '새'라는 시를 서핑하려고 시인이란 검색창을 치니까 내 이름

석자가 뜨길래 설마하여 보니 내가 그놈인지라 밤 시간에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형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형이 신문사를 경영하지

않았다면 또는 덜 다듬어진 시이지만 내가 글쟁이로 살지 않았다면

영원이 이루어 지지 못할 만남이 될수도 있었지 않겠는가?

이 기회에 잔소리 한마디 덧붙이자면, 난 인터넷 정보를 100 % 공개하는

편인데 이는 '신독'이란 말처럼 투명하게 살고 싶어서다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인터넷 정보란에 주소쯤은 오픈하고 살아

볼일이다

누가 아랴? 운명 같은 옛 애인이 지구 반대편 어디선가 그대들의 이름을

애타게 서핑하고 있을지...,

각설하고 날 바느질한 가슴속 여인들보다, 혹은 죽음으로 남기려 했던

사랑의 엇갈림보다 지금 난 더 진한 전율에 사로 잡혀 허둥댄다

' 차암 보고 팠던 형과 그 주윗 분들 ! '

난 이제 확연하게 기 발표 했던 내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시어 하나,

한 행을 더 깊고 높게 그려야겠노라고 다짐한다

빠른 시일 내에 형을 만날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 뒷 산이 높아야

앞 산이 그윽하듯

기다림이 높아라야

사랑도 깊어 지는 것"

(시/ 그리운 것 들은 중에서)